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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일목사 | 사건 중심 구약성서 해설 (46) 2019-02-08 10: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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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온유의 챔피언 이삭의 일생: (1) 아내의 불임과 쌍둥이 아들들(c)(창25:19-26)

 

앞의 글(44~45회)에서 우리는 구약 성경의 인물 가운데 온유, 겸손의 대표적 모델로 알려진 이삭이 아내의 불임이라는 위기상황에서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리게 되었고, 20년 만에 성취된 기도 응답을 통하여 두 부부가 경험하게 된 여섯 가지의 은혜와 보상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오늘은 그 여섯번째 보상으로서, 쌍둥이 아들(에서와 야곱)의 임신 과정에서 (예언자 또는 제사장을 통하여) 듣게 된 두 아들의 미래에 대한 예고, 곧 ‘예정론’(豫定論)에 대하여 좀 더 깊이 살펴보고자 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창25:23).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하여 소개된 ‘이신칭의’(以信稱義) 사상만큼이나 구약성경의 탁월한 사상으로 간주되는 이 예정론은, 특히 사도 바울(롬9:19-29; 엡1:4-6; 등)을 비롯하여 중세의 교부인 성 어거스틴(St. Augustine)과 종교개혁자요 장로교의 창시자인 존 칼빈(John Calvin, 프랑스어로는 장 깔뱅)에 의하여 강조된바, 신앙의 최고 경지에 도달하였을 때에만 이해되는 신학적 사상으로서, 간단하게 말하면, 우주 만물의 창조자요 인류역사의 주인이신 야웨 하나님께서는 모든 개인과 국가의 앞날을 예정하시고 그 예정하신 뜻대로 인류 역사를 섭리하시고 운영하신다는 사상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궁극적인 목적과 인간의 본분이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사43:21; 시150:6)임을 생각할 때, 야웨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과 그 청지기인 인간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참된 왕이시요 주인이시라는 인식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이 예정론보다 더 위대한 찬양의 이론은 없다는 것이 예정론자들의 주장이며, 여기에 필자도 동의하고 싶다.


수천억 광년(光年)보다 더 긴 무한대의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신,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고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의 미래는 물론 가장 짧은 시간의 단위인 개인의 일분 일초까지 주관하시고 그들의 미래를 예정하신다는 사실은 지극히 당연하고 합리적인 논리로서, 야곱과 에서의 미래 예정과 - 약 600년 뒤의 이스라엘과 에돔의 국제 관계에서 실현되는 - 그 예정의 성취는 물론이고, 그보다 훨씬 이전에, 뱀의 유혹으로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수천년 뒤에 태어날 여인의 후손을 통하여 정죄와 심판을 받게 되도록 예정, 예고하셨을 때 그 예정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 사건과 그의 십자가 고난을 통하여 성취되는 것을 볼 때, 성경 안에 예정론 교리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성경의 곳곳에서 인간은, 마치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의 말씀(선악과 금지 명령)을 믿고 순종할 자유와 거역할 자유가 동시에 허락되고 있는 것처럼(창2:16-17), 그리고 신약성경에서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10:9)는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인간 각자에게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과 지옥을 앞에 놓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부여되어 있슴을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에, 예정론과 자유의지론은 성경 안에서조차 서로 상충되는 사상으로, 그리고 해결하기 힘든 하나의 역설(Paradox)로 간주되어 왔다. 아마도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진리로 간주되는 이 예정론은 인간이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서야 깨닫게 되는 역설 중의 역설이요 미스터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성 어거스틴에게 찾아온 한 청년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셨는가 질문하자, 어거스틴은 “그런 질문을 하는 자를 위하여 지옥을 만들고 계셨다”고 대답했다 하지 않는가? 우주보다 크신 머리를 갖고 계신 하나님의 논리를 바가지보다 작은 인간의 두뇌와 논리로 어찌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안에는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기 힘든 진리들이 수두룩하게 마련인데, 그 난해성을 그대로 인정하고, 마치 신약의 모든 책들에 대한 주석을 집필하면서도 난해한 요한계시록의 주석만큼은 아예 집필을 죽기까지 미뤘던 존 칼빈의 겸손한 모습이 피조물 된 우리 인간에게 마땅한 자세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예정론의 거대한 장벽 앞에서 미리부터 겁을 먹고 이 난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하여, 니고데모(요3:1-15)와 같은 참된 탐구자의 자세를 포기하는 것도 성도로서의 올바른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필자가 이 예정론의 난제에 대한 정답을 찾았다고 장담할 수 없지만, 그동안 여러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주장을 참고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조심스럽게 내려본다.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하여 성취된다는 사실이다. 즉 인간의 자유의지도 하나님의 예정 안에 들어있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서로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해결책을 제시하는 내용이 사도 바울의 서신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자유의지로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한 그들)을 ...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갈1:15-17);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예정)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자유의지)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장영일목사

구약학 Ph. D.
성령사관 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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