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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두목사 | 먼 훗날 축복의 만남 2019-01-11 20:5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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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높은 가을 하늘, 구름 한점 없던 날, 반가운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꼭 만나고 싶었던 사람의 음성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정재입니다. 저는 지금 워싱턴 주 타코마에 왔습니다. 잘 계시지요?”


워싱턴 주라면 오레곤 주와 콜롬비아 강을 경계로 바로 북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자동차로도 몇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입니다. “김 목사님! 어서 오레곤으로 내려와요” 김목사님은 이튿날 유진 공항에 도착하였습니다. 참으로 오랫만에 만나 꿈과 같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헤어진 그 긴 세월의 연륜도 우리의 기억과 따뜻한 정을 씻어내지 못함이 놀라왔습니다. 약 40년 전인 1980년, 인천에서 목회하고 있던 어느 주일 아침에 한 가족이 처음으로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중식을 나누며 가진 친교 시간은 잔칫집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식구들을 나란히 옆 좌석에 앉히고 차분히 예배를 드렸던 아버지는 조용한 성품의 가장이었고 다정다감한 어머니는 소녀처럼 즐거워하였습니다. 둘째인 김정재 학생은 당시에 고등학교 학생이었습니다. 정재네 가족은 처음 교회에 발을 들여 놓은 후 꾸준히 거의 모든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어머니는 교회의 여선교회와 구역 활동에 아주 적극적이었습니다. 온 가족은 교회의 생활을 즐거워하였습니다. 정재군은 주일 오전, 저녁 예배 뿐 아니라 수요예배, 새벽기도회에도 참석하였습니다. 말이 별로 없었던 정재군은 가끔 혼자 교회당에 들어와 몇 시간씩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나라의 부름을 받고 정재군이 입대하던 날, 항상 밝기만 하던 어머니도 애써 감췄던 눈물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소심하고 착한 성격의 아들이 군대 생활을 잘 이겨낼 수있기를 위해 새벽마다 기도를 쉬지 않았습니다.


“어렸을 때 우리 아들은 지렁이만 보아도 기겁을 하곤 했는 데, 어떻게 훈련을 마쳤는 지 모르겠어요. 어느 날 부대에 하사된 산 돼지 한마리를 제일 쫄병인 우리 아들을 보고 잡으라고 했답니다. 우리 아들은 이리뛰고 저리뛰는 그놈의 돼지를 잡느라고 혼이 났답니다.”


우리는 함께 웃었습니다. 어느 주일 예배에 50대의 풍채 좋은 신사 한 분이 참석하였습니다. 얼굴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어디선가 만났던 분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등록을 하지 않은 채 세 번 째 주일 예배에 참석 한 날, 급히 밖으로 나가려던 그 신사를 붙잡고 잠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선생님, 혹시 교편 잡은 일이 계셨습니까?”
저의 물음에 그 신사는 잠시 머뭇 거리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네, 어떻게 아시지요?”
저의 예감이 적중했습니다. 그 신사는 제가 중학교 다닐 때 2학년의 담임 선생님이셨습니다. 꿈만 같았습니다. 중학교 졸업을 한 후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금 김 선생님은 저의 설교를 매주 듣는 성도가 되었고, 그의 어린 제자였던 저는 목회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김 선생님은 중학교 교편 생활을 마감한 후 지금은 인천대학교의 연구 교수로 재직하고 계셨습니다. 자신에게 매주 설교를 하는 강단의 설교자가 옛날의 자신의 제자라는 사실을 늘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얼마후 선생님의 가족이 인천으로 합류하였습니다. 온 가족이 우리 교회의 성도가 되었습니다. 주일마다 제일 먼저 교회당 앞줄에 앉아 귀를 기울이는 김 선생님과 그 가족들이 고맙기만 했습니다. 사모님은 따뜻한 어머님 같았고 자녀들은 형제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맏딸은 유아 교육학을 전공하고 있었습니다. 어버님의 성품을 닮아 너그러운 인품과 자상함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어디에 내 놓아도 자랑스러운 스승님의 딸이 대견스러웠습니다. 군 임무를 잘 마친 정재군은 다시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달라진 것은 의젓한 청년이 된 모습입니다. 어느 날 정재군이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 신학을 공부하고 싶습니다. 기도해 주세요”


이 말을 꺼내기까지 많이 망설였던 것 같았습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회의 길이 얼마나 힘든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신학 입학 서류를 전달하고 원서 기재사항들을 꼼꼼하게 설명한 후 얼마 안되어 저는 긴 유학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빠르게만 지나가는 외국의 생활 속에서 정재네 가족도, 김 선생님의 식구들도 까마득히 기억에서 멀어만 갔습니다.


그 긴 세월을 접고 정재군은 든든한 목회자로 눈 앞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김 선생님의 맏딸은 김정재 목사님의 사모님이 되어 있었습니다. 정재군은 국제 공항교회의 담임목사로 세계 선교의 꿈을 키워나가고 있었고, 사모님은 유치원장님으로 어린 생명들의 마음 밭에 생명의 말씀을 뿌리고 있었습니다. 소녀같은 웃음을 잃지 않았던 김목사님의 어머님은 아들을 위해 주야로 기도하는 권사님으로 제단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김 목사님과 김 선생님의 가족을 처음 만난 지 4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다시 맞게 된 먼 훗날 만남의 축복은 세월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게 했습니다.


만남이 주는 말로 다 할수 없는 기쁨과 위로의 날이었습니다.
 

 


전병두 목사

유진중앙교회
(오레곤 주 유진/
스프링필드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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