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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근장로 | 극동방송칼럼 25 2019-08-12 14: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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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극동방송 가족 여러분!

 

마지막 삼복더위라고 할 수 있는 말복 날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뜻 깊은 이날 아침 시간에는 지난주에 잠깐 소개해 드렸습니다만 십여 전에 저희 부부가 하나님의 섭리하심으로 7년 동안 마태목장을 운영해오면서 70여명의 이런저런 불신자들이 거쳐 갔었는데 이들과 함께 체험했던 놀라운 일들 중 먼저 저희 부부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적 같은 일들을 먼저 소개해 드려볼까 합니다.

 

거듭 이야기입니다만 변변치 못한 저희 부부가 이렇게 마태목장이라는 ‘부부사랑 프로그램’을 만들게 된 배경에는 제 나름대로의 애틋한 사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약관 20세 철없는 나이에 국세 공직자로 입문한 후 40년가까이를 한단계 한 단계 힘겹게 올라가면서 오로지 일에만 매달렸던 저는 세상적으로는 나름대로 성공했을지 몰라도 반면에 희생된 것도 못지 않게 많았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저와 가장 가까이 지내야 하는 아내와 아들과 딸과의 관계에서 씻을 수 없는 많은 상처를 남겼답니다.

 

제 나름대로의 변명인지는 모르겠지만 특별한 학벌이나 재력이나 배경도 없이 그저 일 하나로 승부해오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지금 되돌아보아도 제 인생 전반전이라 할 수 있는 국세 공직자 시절에는 아내와는 참으로 많은 갈등을 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가정을 다스리기 보다는 오로지 바깥 직장 일에만 신경을 썼으며 심지어 휴가는 말할 것도 없었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내나 아들, 딸은 아예 저를 진정한 대화 상대자로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참다 못한 아내는 더 이상 이런 상태로는 안되겠다며 마지막 극약처방을 저에게 제시했습니다. 흔히들 운동경기에서나 있을 법한 전·후 반전 사이에 가지는 작전타임처럼 인생의 작전타임을 함께 가져 보자고 졸라 되는 것이었습니다.

 

참고로 저는 1946년 6월 25일에 태어나 다섯 살 때 6·25 전쟁을 맞았습니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때 일본 오사카에서 제 어머니와 결혼해서 형과 누나와 함께 그곳에서 생활하다 해방과 더불어 귀국하여 저와 49년생 남동생 이렇게 여섯 식구가 고향 땅 경남 진주에서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우리들만 남겨 놓고 일본으로 가는 밀항선을 타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제 어머니께서는 어린 4남매를 데리고 인근 경남 의령이라는 시골에 있는 외갓집으로 들어가 더부살이 하게 되었는데 불행히도 저는 2살짜리 남동생과 함께 심한 영양실조에 걸려 오늘날 아프리카 어린이 같이 뼈만 앙상하게 남아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마지막 수단으로 정체불명의 고기 수십 마리를 잡아서 먹여 주셨는데 먼 훗날 그 정체 불명의 고기가 바로 들쥐고기였음을 알았습니다. 다행히도 저는 그 고기 덕분에 죽음의 문턱에서 되살아났으나 어린 남동생은 소화를 시키지 못해서 결국 이름도 없이 하늘나라로 가버렸습니다.

 

그런 처절한 고통의 순간들을 거친 3년 후에 아버지께서는 귀국하셨는데 그동안 일본에서 직조 공장 기술을 배워 오셔서 당시 섬유산업이 번창했던 대구시 변두리에 있는 조그마한 직조 공장 공원으로 취업을 하게 되어 저희 가족들도 이곳 변두리 지역에 널려있는 판자촌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태어난 두 여동생까지 모두 7식구가 정말 어렵게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아버지께서는 평소에는 무척이나 말이 없는 분이셨는데, 이상하게도 술만 드시면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서 어머니에게 손찌검은 물론이고 심지어 우리 어린 것들에게 까지 몹쓸 짓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힘없는 무학자의 처지 인지라 사회생활에는 자신이 없으시다 보니 그 화풀이를 만만한 우리 식구들에게 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짐작이 듭니다. 그런데도 당시 어린 제 생각에는 그런 뜻을 알 길이 없었던 터라 집안에서 부부싸움이 벌어지는 밤이면 집을 뛰쳐나와 인근에 있는 초등학교 운동장을 배회하면서 자주 외쳐 대던 말이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 언제 죽노?”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흘러 제가 서울시내 세무서장 시절에 삼수생이었던 아들이 참으로 못마땅해서 어떤 때는 손찌검까지 했었는데 어느 날 아들이 “우리 아버지 언제 죽지?” 라고 써 놓은 메모지를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 아내의 강력한 요구로 결국 당시 용산에 있는 어떤 대형교회에서 실시하고 있던 ‘아버지 학교’라는 곳을 다니게 되어 한 달간의 교육을 받고 난 후 아들과의 높은 벽을 허물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다 오래 전부터 아내와도 대화가 단절되다 보니 퇴근 후 단 둘이서 오붓하게 앉아 이야기 한 번 못해보고 오로지 직장 일만 생각하는 한마디로 일 중독자로 굳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보다 못한 아내가 마지막 처방으로 제 손을 끌고 간 곳이 바로 ‘부부 사랑 프로그램’을 전문으로 하는 어떤 ‘부부치유상담학교’ 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곳에서 진행하는 2박 3일간의 부부갈등 치유 프로그램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참석한 저는 그때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희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70여 쌍의 부부가 참석했는데 그들 대부분이 이혼 직전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대여섯 쌍의 부부로 짜인 조별 모임에서 부부 마다 피눈물 나는 사연들을 들으면서 3일 동안 참으로 많이 울었습니다. 그러면서 진정한 부부 관계란 제가 알고 있던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3일간의 부부 사랑 프로그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저와 아내는 그 부부 학교에 정식으로 입학해서 본격적으로 부부갈등치유 수업을 받았는데 저는 6년 이상이나 아내는 10년이 넘도록 열심히 배워 지금은 베테랑 코치 수준에까지 올랐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섭리로 저희 부부는 우여곡절 끝에 인생 전반전과 후반전 사이에 작전 타임이라는 소중한 골든 타임을 거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사랑하는 후배 세무 공직자들 에게도 저희 부부를 통해 부부갈등 회복의 과정들을 전수해 주라고 지시 하신 것 같았습니다. 무엇보다 인생 후반전을 더욱 행복하게 보내려면 우선적으로 아내와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과 또 이것이 제대로 세팅만 되면 진정한 나눔과 섬김의 사역까지도 잘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 까지도 확신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극동방송 가족 여러분!

그렇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한 진정한 나눔과 섬김의 사역들을 제대로 실천 해나가기 위해서는 혼자보다는 무엇보다 사랑하는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의 든든한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는 선결조건을 마음에 새기고 우리 모두도 지금부터 가족 회복 운동을 함께 실천해 보면 어떨까요?

 

다행히 저희 마태목장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섭리하셔서 먼저 섬기려고 하는 저희 부부 관계가 제대로 회복 되게 하신 상태에서 출발해보았더니 지난 7년 동안 하나님께서 이런저런 희한한 일들이 많이 보여 주셨습니다 궁금하시죠? 다음시간에 뵙겠습니다. 샬롬

 


조용근 장로
. 석성회계법인 회장
. 석성장학회 회장
. 미얀마 석성고등학교 설립자
. 한국세무사회 회장
. 천안함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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