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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돈목사 | 미국의 역사와 전통을 만들어낸 사람들 41 2020-01-11 07:4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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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대 대통령 재커리 테일러(Zachary Taylor) 2

 

커리 테일러의 인기가 너무 높아지면서 제임스 포크 대통령은 그가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올 것을 염려하여, 또 다른 유명한 장군 스캇 윈필드를 멕시코 시티로 보내 멕시코와의 전투를 최종적으로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그러나 테일러는 포크의 명령을 무시하고 자기가 먼저 멕시코 시티로 가서 1847년 2월 23일 그의 군대 5000명으로 멕시코의 유명한 장군 안토니오 로페즈의 15,000~20,000여 명에 해당하는 군대를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었다. 이 뉴스는 전국적인 휘그당 리더들이 그를 다음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려고 찾아나서게 만들었다.


그가 1849년 3월 5일 취임하고 나서 국회에서는 멕시코 전쟁 이후 남서쪽 지역 주들이 노예제도에 대한 이슈로 미합중국으로부터 탈퇴했다는 사실 때문에 토론이 계속됐다. 테일러 자신도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으나, 그는 노예제도를 지지하지 않았다. 캘리포니아와 새로 주가 된 뉴 멕시코는 노예제도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남쪽에 많은 노예 소유주들은 유니언에서 탈퇴하겠다고 했다. 테일러는 그들의 유니언에서 떠나려 하는 시도에 대해서는 텍사스와 뉴멕시코 주 사이에 군대를 보내어 지키겠다고 맞대응했다.

온건파 휘그당과 민주당은 테일러의 반응에 절망했다. 1850년 1월 노련한 정치가인 헨리 클레이는 타협 법안을 제안했다. 그는 캘리포니아는 노예없는 주로, 뉴 멕시코와 유타 주는 노예이슈를 자기들이 결정하도록, 그리고 남쪽 노예소유주들에게 북으로 도망간 노예들을 되돌려보내는 일에 연방적인 차원에서 협조를 하자고 제안했다. 클레이는 그런 타협안이 유니언을 강하게 하고 유니언이 깨지는 것을 막을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1850년 타협안”이라고 알려진 법이다. 테일러는 이 법안이 자기 데스크에 도착하는대로 대통령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영국의 외교관 윌리암 불워경과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블레인 간 협약을 통해서 미국과 영국은 중미에 파나마 해협을 컨트롤하기 위해서 전쟁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클레이턴-불워 협약).

 

테일러는 1850년 7월 4일 워싱턴 기념비 건축 시작을 위한 축하연에 뜨거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여러 시간 참여하여 애국 강연들을 듣고, 찬 물을 많이 마시고, 얼음 잠긴 우유에 담근 앵두를 많이 먹었다. 그날 밤 그는 심각한 급성 소화 불량으로 몸져 누웠고 5일 뒤에 세상을 떠났다. 먼저 그의 시체는 국회 묘지에 묻혔다가 후에 루이빌 켄터키 가족 묘지로 옮겨졌고, 오늘날 이것은 재커리 테일러 국립 묘지로 알려져 있다. 
테일러의 부인은 그의 남편이 1812년 멕시코 전쟁에 나갔을 때 하나님께 “만일 내 남편이 안전하게 돌아오게 해주시면, 나는 모든 사회 활동에서 물러나 자중하는 삶을 살겠다”고 서원했다 한다. 그리고 재커리 테일러가 안전하게 귀가한 뒤로 그녀는 그 서원을 지켰다. 페기 테일러는 영부인으로서도 지극히 제한된 일들만 처리하고, 나머지는 딸 메리 엘리자베스 블리스가 담당했다. 남편이 떠난 2년 뒤 1852년 그녀도 세상을 떠났다.

 


 

 

 

 

 

박용돈 목사

예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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