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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돈목사 | 미국의 역사와 전통을 만들어낸 사람들 42 2020-01-18 14:3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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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대통령
밀라드 필모어(Millard Filmore, 1850-1853) 1

 

13대 대통령 필모어의 임기는 길지 않았으나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1850년 7월 재커리 테일러 대통령의 갑작스런 죽음 뒤에 그는 중요한 5개의 법안을 서명했다. 그중 하나는 “1850년 타협”이라 알려진 법안인데, 그것은 노예제도를 선호하는 남쪽 주들과 그것을 반대하는 북쪽 주들이 갈라지는 것을 막으려는 타협법안이었다.

 

필모어는 미국을 유니언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 의견을 최대한 양보한 것이다. 노예제도 폐지론자들에게는 반발을 받으면서도 남쪽 주들을 진정시키고 남북의 결별 위기를 면하게 하여 남북전쟁을 한 10여 년간 지연시킨 것이다. 한편 필모어가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는 캘리포니아 골드 러쉬(금광맥을 찾아 달려가는 서부 이주 현상)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는 골드 러쉬에 따라 사람들을 서부로 이동하는 데 필요로 하는 철도를 놓았고, 캘리포니아를 자유주로서 유니언에 가입하게 했다. 또한 물품을 팔 새로운 무역국으로 이전에는 거부하던 일본과의 무역 관계를 수립했다. 
 

필모어는 자수성가한 훌륭한 인물이었으나 대중 앞에서의 언변이 부족했고 특히 대통령이 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떠밀려 자리에 앉혀지자, 그는 아주 대담하게 행정적 결정을 내리는 데 탁월했고, 힘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1850년 타협 법안을 지켜냈다. 
 

필모어는 9남매 중 둘째로 뉴욕 카유가 카운티에서 1800년 1월 7일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나다나엘은 세낸 농장에서 일했고, 필모어는 아버지 밑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한편 양복재단 하는 기술을 배우고 있었다. 그의 유일한 교육은 일하는 사이 사이에 아비가일 파워라는 여선생에게서 읽기와 쓰기를 배운 것이다. 파워선생은 필모어보다 겨우 2살 위였고, 그들은 7년 뒤에 결혼했다. 유니태리안 교회에 나가던 필모어와 아내는 교회에서 자란 신실한 프로테스탄트들이었다.
 

그보다 훨씬 전에 필모어는 카운티 사무실에 월터 위드라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비서로 일하면서 변호사의 도서실 책들로 법을 공부했다. 1823년 그는 에리 카운티의 변호사 시험을 합격하고, 이스트 아로라에 법률사무소를 열었다. 3년뒤 그는 아비가일 파워에게 구혼했고, 그들은 두 아이를 갖게 됐다. 그들은 다음 단계로 버팔로 뉴욕으로 이사해 지역 정치사회에 입문했다. 거기서 그는 메이슨과 같은 형제단 비밀파티를 반대하는 신문발행인 털로 위드를 만났고, 위드는 필모어를 주 입법부 후보자로 지원해 주었다. 위드와의 우정을 맺은 것이 계기가 되어 필모어는 점점 국가적인 무대로 나아가게 되었다. 1832년 그는 안티메이슨 후보로서 국회에 나가 한 임기를 마치고, 휘그당으로 당적을 옮겨 1836년 다시 국회에 나가 연속 세번 당선됐다. 그는 1842년 인기가 정점에 있을 때 국회의원직 사퇴를 선언했으나 뉴욕으로 돌아와 2년 뒤 뉴욕 주지사 휘그당 후보로 출사표를 던졌다가 실패하고, 정치를 떠나 법률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러나 1848년 대통령 지명 대회에서 재커리 테일러가 남쪽 노예소유자로 대통령 후보가 되면서, 북쪽에서 이전 국회의원이자 유능함을 인정받은 반노예주의 필모어 같은 사람이 부통령으로 필요했고 휘그당은 결국 테일러-필모어 티켓을 결정했다.

 


박용돈 목사
예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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