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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환목사 | 고백과 포용 2020-02-14 12: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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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하나는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자존심이 상하고, 손해를 보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잘 했다”고 박수를 쳐주고 격려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언제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피해를 잘못을 고백한 당사자가 오롯이 다 짊어져야 합니다. 십중팔구는 대부분 쓸데없는 만용을 부렸다고 자책하게 됩니다. 개인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과 사회가 그 잘못을 수용해 나아가는 태도는 언제나 궁합이 맞아야 합니다. 합리적인 체벌과 용서의 과정이 함께 가야 합니다.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가 치유의 과정을 함께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회복의 은혜가 주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은 자기 고백에 인색하지 않을 것입니다. 개인의 고백과 사회의 포용은 언제나 동일선 상에 놓여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좀처럼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오리발을 내민다고 비난합니다. 정치인이나 기업인 그리고 연예인들이 성추문이나 금전 비리로 언론에 회자 될 때에도 웬만하면 깨끗하게 자신의 과실을 인정하면 좋을텐데,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합니다. 막판까지 “나는 절대 아니라”고 책임을 부정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순간에 검찰로 넘겨져서 포토라인(photo line) 앞에 서게 되면, 그제서야 비로소 달기 똥 같은 굵은 눈물을 떨구며 “죽을 죄를 지었다”고 고개를 숙입니다. 사람들은 혀를 차며 “그럴 줄 알았다”고 손가락질을 해댑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빨리 잘못을 인정하지 않아서 바보처럼 국민들의 공분까지 사느냐?”고 안쓰러워합니다. “괘씸죄”가 가중처벌로 추가됩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사람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평생 이런 그림을 매스컴을 통해 수도 없이 보아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말을 하던, 저는 개인적으로 끝까지 범죄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이해합니다. 끝까지 버티다가 발각되어서 처벌을 받던, 아니면 처음부터 깨끗하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처벌을 받던 결과는 언제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입니다. 다시는 회복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십계명” 다음으로 생겨난 열 한 번째 계명이 “어떻게든 걸리지 마라”입니다. 걸리면 어차피 모든 것이 끝장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혹시나”하는 마음으로 버티고 견뎌봅니다. 그러다가 간혹 운 좋게 살아남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일찌감치 마음의 자유를 얻겠다고 자신의 과실을 다 인정해 버리게 되면, 일고의 가치도 없이 모든 죄를 다 뒤집어 쓰고 맙니다. 한국 사람들이 다른 외국 사람들에 비해 좀처럼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자기 성찰이 약하거나, 어떤 특별한 민족성을 지녔기 때문이 아닙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자진해서 고백을 해도 “용서”(forgiveness)가 주어지지 않는 사회에서 자라났기 때문입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이나 학교 선생님 앞에서 꾸중을 듣거나 체벌을 당할 때, 잘못했다고 인정을 하게 되면, 책망이나 체벌의 시간이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면죄부를 주거나 따뜻한 격려를 해주는 것은 동화책에나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삶은 콩에 이도 안 들어갈 소리입니다. 오히려 비난과 모욕의 시간이 마음껏 펼쳐집니다. 죽도록 얻어터지고 나면,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다음부터는 끝까지 개기자.”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자신의 여비서였던 “르윈스키”(Monica Lewinsky)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국민들에게 고백하고 나서, “솔직한 대통령”이라는 찬사를 받은 것은 한국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영원히 풀리지 안는 수수께끼 입니다. 지금은 달라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은 사회적 관용이 인색한 나라입니다. “술을 먹고 운전을 했지만, 음주 운전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와 한 침대에 누워서 잠을 잤지만 불륜은 아닙니다.” 아직도 여전히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항전하는 이유는 그 편이 오히려 살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나다나엘 호돈” 문학의 금자탑이라 일컫는 “주홍글씨”에 보면, 당시 청교도들이 죄를 지으면 높은 강단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죄를 고백하고 나면 사죄를 위해 그 죄과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특별히 “간음”과 같은 죄를 짓게 되면, 가슴에 주홍색으로 된 글자 “A”를 달고 살게 했습니다. 물론 이 “A” 자는 “간음”을 뜻하는 “Adultery”의 앞 글자 입니다. 이런 형벌은 죄를 멀리하고 경건한 삶을 살게 하려는 의도에서 고안된 것입니다. 또 죄를 지은 사람에게 속죄와 만회의 기회를 주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이야기 속에는 “캐더린”이라는 여주인공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남몰래 “딤즈데일”이라는 경건한 목사와 간통을 해서 예쁜 딸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녀는 끝까지 간통한 남자의 이름을 숨기고, 오직 속죄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그녀의 헌신과 참회하는 삶 때문에 사람들은 나중에 캐더린의 가슴에 새겨진 주홍글씨 “A”를 “천사”를 뜻하는 “Angel”로 이해하게 됩니다.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답답하게만 느껴지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회복의 은총이 주어지는 것이 너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한국의 조선시대에는 똑같은 간통의 죄를 짓게 되면, 날카로운 칼로 이마에 “간”(姦)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그리고 어디를 가든지 영원히 “간부”로 낙인이 찍히는 것입니다. 그런 막장 문화 속에서는 무조건 버티는 것이 현명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아픈 문화입니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스포츠 종목인 “펜싱”(fencing)은 칼로 결투를 벌여 승부를 가리는 경기입니다. 다른 경기 종목과는 달리 가늘고 예리한 칼로 빨리 상대방을 찔러 승부를 가리다 보니 누가 이겼는지 판가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칼로 상대방을 제대로 찔렀는지, 아니면 찔린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빗나갔는지 판가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론 옆에서 심판이 자세히 들여다 보겠지만, 분명히 한계가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종목의 스포츠는 공격에 성공한 선수들이 자신의 승리를 선언하고 환호하지만, 이 펜싱은 공격을 당한 사람이 오히려 자신의 패배를 솔직하게 선언해 주어야 합니다.
 
칼에 찔린 선수가 먼저 “투셰”(touche)라는 말로 패배를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투셰”는 “내가 찔렸다”, “내가 졌다”라는 뜻으로 자신의 패배를 선언하는 말입니다. 요즘에는 펜싱복도 정밀하게 전자장비들이 설치되어 있고, 검이나 초고속 카메라 장비들도 아주 예민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간단하게 스치기만 해도 금방 “삐”하는 신호음이 들리고, 점수 표시등에 빨간 불이 들어오지만, 옛날에는 오직 가까이에서 맨눈으로 심판관이 지켜보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공격을 당한 선수가 모르는 척하고 시치미를 떼면 영락없이 큰 논란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펜싱을 신사들의 경기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실력 못지 않게 언제든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줄 아는 진실함과 겸허함이 요구되는 종목이기 때문입니다. “투셰”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아름다운 말 중의 하나입니다. 자신의 부족을 언제든지 고백하고, 또 그 고백을 넓은 마음으로 포용해 줄 수 있는 그런 사회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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