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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돈 목사 | 미국의 역사와 전통을 만들어낸 사람들 60 2020-05-23 10:0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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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 대통령
루더포드 버차드 헤이스 (Rutherford Birchard Hayes. 1877-1881) 2

 

남북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전 노예들의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고, 1876년 대통령 선거는 흑인들의 상황을 개선하려는 공화당과 그에 반대하는 민주당의 대립이었다. 헤이스의 대통령 취임을 반대하는 일부 무리의 암살 위협이 있어, 그는 취임식 이틀 전에 비밀리에 이미 대통령 선서를 마쳤다. 그의 취임식 연설의 핵심은 “국가의 영원한 화평”이었다. 남북전쟁 후 일어날 폭력 위험에 대비해서 연방정부군이 아직도 남쪽에 주둔중이었는데, 헤이스는 취임 후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경쟁적인 두 주지사들을 만나 타협했고, 연방정부군을 퇴각시키고 나서 한 사람의 주지사로 만들었다. 루이지애나 주지사와도 만나 타협 후 연방군을 퇴각시켰다. 남쪽 주들이 각자의 독립성 인정을 받은 후 갈등은 일단락됐다. 1877년 6월 그는 또다시 정부인사가 정치적인 기관이나 지방정치 간부 회의, 정당대회, 혹은 선거 운동하는 것에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의 직무를 이행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한 공적으로 질문을 받았을 때나 언론에 그들의 견해를 밝히는 것은 허락됐다.
헤이스는 정부의 모든 지불에 관해 금으로 지원되는 종이돈을 선호했다. 남북전쟁 기간에 정부가 그린백이라는 돈을 많이 발행했었기 때문에, 돈의 가치가 낮아지면서 상대적으로 물가 상승이 만연했다. 헤이스에 반대하여 국회는 실버동전을 더 만들기로 했고, 헤이스 취임 때부터 이미 다수당이 된 민주당은 헤이스가 통과시켜야 할 정책에 자기들이 원하는 내용을 동시에 끼워 넣어 통과시킴으로써 대통령이 거부권 행사를 못하도록 하는 횡포가 많았다. 그중 하나는 선거에 군대의 개입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헤이스는 응급시에는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응급시라는 것은 흑인들이 부정투표 위협을 받을 경우를 말하는 것이었다. 헤이스는 또 중국 이민자들을 제한하는 법안을 대통령 거부권 행사로 막았다. 당시 많은 미국인들은 중국인들이 미국내에 많아지는 것을 반대했었다.
헤이스는 당선 때 약속대로 두 번째 대통령 후보 출마를 접고 조용하게 퇴직했다. 퇴직 후 그는 고향 스피글 그로브, 프리몬트 오하이오에 돌아가서 퇴역 군인 기관들을 발전시키는데 힘썼고,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 기금을 마련하는 피바디 재단의 이사로서 활약하여 크게 이바지했다. 그리고 고향인 프리몬트 오하이오에서 1893년 1월 17일 잠들어, 그보다 4년 앞서 간 부인 루시 옆, 스피글 그로브에 뉘였다. 그의 국민을 위한 봉사는 남쪽 주들을 재건설하는 일을 이룬 것이었고, 그의 연방정부 예산과 지출이 미국경제를 안정시키는 데 옳은 것이었음이 증명됐다. 흑인 및 소수자들의 인권 보호는 크게 칭찬할 만 하다. 그러나 그가 연방군을 남쪽 주들에서 제거하고 난 후 사실상 남쪽 주들에서 흑인 차별과 분리는 더 심해졌다. 대통령은 남북을 헌법에 명시한대로 현실화하려 힘썼으나 당시의 미국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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