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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덕성교수 | 왜 신은 인간이 되었는가? 3 2020-02-16 06:2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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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셀무스의 이론을 거부한 사람도 있다. 스콜라주의를 괴멸시키는 단서를 제공한 존 던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 1265-1308)는 안셀무스의 구속론과 관련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킨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만족스러울 정도로 충분한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자비로 그것을 만족스런 것으로 여겨 받아주었다고 생각했다. 유리창을 깬 가난한 집 아이의 어머니가 그 집주인에게 가져온 작은 선물이 비록 충분한 보상은 아닐지라도 그 정성을 보아서 더 이상의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안셀무스의 구속론에 대한 비판은 주로 그가 하나님의 자비보다 공의를 부각시킬 뿐만 아니라 손해를 끼쳤을 때는 그것에 상응하는 배상을 하도록 하는 서양사회의 공의체계(system of justice)를 이론화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법개념으로 이해하고 접근했다고 비판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 공의의 원칙을 만족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고 자신을 속량제물로 바친 것으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공의체계는 서양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동양사회에도 존재한다. 어느 나라든지 전쟁터에서 패전한 장수가 돌아오면 임금은 그의 공로를 먼저 확인한 후에 그의 과오를 따져 상응하는 벌을 내린다.
 

하나님은 형벌과 보상 중에서 반드시 그 어느 하나만을 택하는가? 옆집의 아이가 공을 가지고 놀다가 창문을 깨트렸다고 하자. 아이가 그 집주인에게 온전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주인은 그 아이의 철없음을 고려하여 형벌이나 보상없이 그냥 용서해 줄 수도 있다. 안셀무스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형벌과 보상 중 그 어느 하나의 길만을 택하는 것으로 여겼다. 돌아온 탕자와 그를 용서한 아버지의 비유 그리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는 말씀에 나타난 것은 안셀무스의 사고체계와는 달리 처벌이냐 속상물이냐 하는 양자택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무조건적이다. 안셀무스의 구속론은 중세기적 특징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수난의 목적을 마귀의 속박에서 풀어주거나, 마귀에게 진 빚을 갚아 주려는 데 있다고 본 교부들의 이론을 부정하는 반면에, 그 빚을 하나님께 갚는다고 하면서 조공물을 바쳐야 신의 자비를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출생에서 죽음까지 모두 구속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안셀무스는 그리스도의 죽음에만 초점을 둔 나머지 그의 전 생애가 구속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간과한다. 또 그리스도의 고난 당하심이 하나님의 영예를 회복하기 위한 자발적인 희생이라는 점에 초점을 둔 나머지 그것의 형벌적 대속사역의 의미를 간과한다. 후대에 등장한 형벌적 대속설(penal substitutionary doctrine)은 이 점을 보완한 것이다. 또 안셀무스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법적인 관계에서 죄인들에게 적용할 뿐, 그리스도와 성도들 사이에 있는 신비적 연합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못했다.
 

안셀무스는 기독교사상사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신학자이며, 교회의 훌륭한 교사였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대속제물(satisfaction)로 바쳐졌다고 설교할 때마다 우리는 중세수도사 안셀무스의 지도를 받고 있다. 그의 구속론―만족설은 세심한 탐구력을 가진 중세스콜라주의의 학풍이 물려준 위대한 유산이다.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이 마귀를 무너뜨리지도 않고 마귀에게 짓밟힌 채 하나님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상태에서 하나님과 화해하겠다고 하니 이것이 하나님의 명예를 얼마나 더럽히는 것인지 스스로 생각해 보라. 이 승리는 사망의 협곡을 따라가서 아무런 죄도 짓지 않고 마귀를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죄 안에서 잉태되고 태어나기 때문에 이러한 승리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안셀무스, Cur Deus homo, 1. 23).
 

위 글은 최덕성, <종교개혁전야>를 각주 생략하고 옮긴 것이다. 이 책은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을 가능하도록 한 중세기 종교개혁운동을 다뤘다.
신앙의 권위가 교황에서 성경으로 전이되어 종교개혁운동의 바탕이 되었음을 전개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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