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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희 목사 | 세대를 이끄는 기도의 사람 - 엘리야 5 2020-08-01 14:0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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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tion 2 - 복종의 훈련 속에서 성장하다 ⓵

기대와는 다른 진행
세대를 이끄는 기도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매일 명상의 시간을 갖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보면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진단하고 그 말씀의 진행을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 움직임 (Action)은 오직 그 말씀인 성경에 대한 확신과 열정을 가진 사람이 이룰 수 있는 일입니다. 성경의 내용을 좋은 이야기나 하나의 교훈, 종교의 경전 정도로 여기는 상태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엘리야는 자기 시대에 있는 기록된 말씀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열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록된 말씀을 근거로 하여 분연히 일어섰습니다. 그러면, 아합은 엘리야 선지자의 말을 믿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확신과 열정을 기특하게 여기셔서 아합이 엘리야의 선포를 들었을 때에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변화 되는 일을 보여 주셨을까요? 아니, 그런 변화까지는 아니라도 엘리야의 말에 무게를 두고 함께 머리를 맞대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의논했을까요? 물론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닙니다. 그는 엘리야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아합 왕은 시골의 일개 선지자의 말에 의하여 국가 경제의 기반이 되는 사건이 좌우 될 것이라고는 절대로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비에 대하여는 아합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신의 뒷배를 보아준다고 여기는 사람이 따로 있었는데, 그것은 자기가 아내로 맞이한 이세벨입니다. 그녀는 오랜 세월동안 가나안 지역의 강수를 지배해 온 바알 우상의 선지자의 딸입니다. 그녀 자신도 바알의 선지자이기도 하고요. 바알 종교 행사와 그 달력에 따라 너무나 적절한 시간에 맞추어 비는 왔고, 적절한 타이밍의 비와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며 바알과 아세라를 기쁘게 한다는 종교 행사는 백성들에게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호소되어 왔습니다. 아합의 아버지 오므리 왕 때에도 별 문제 없이 다스려 왔고 자신의 시대에도 강수에 대하여 만큼은 지금까지 아무 문제가 없어 왔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엘리야의 말을 귀기울이며 듣겠습니까? 단지 아합의 입장에서 시골의 일개 선지자가 절대 왕권을 가지고 비를 다스릴 수 있는 위엄 있는 왕으로 비쳐져야 할 자신에게 공개적으로 대들고 있는 모습이 괘씸했을 것입니다. 엘리야가 마치 자신이 비를 다스리는 것과 같은 표현을 했으니 얼마나 괘씸했겠습니까? ( 엘리야는 왕에게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열왕기상17:1) 당연히 체포 명령이 떨어졌겠죠.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엘리야 선지자가 기록된 말씀에 대한 확신과 열정으로 일어서자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기록된 말씀과 함께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종 선지자들에게 특별한 말씀을 주시는 부분입니다. 성경 말씀에 대한 확신과 열정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어그러진 부분을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선언하고 일어섰을 때에 하나님의 특별한 메세지가 임한 것이니 그 내용이 정말 기대될 만 합니다. 
 

아합의 체포 명령이 떨어졌을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뭔가 그 위엄 있는 음성을 들려주시고 멋진 일을 하나 보여주시면, 이렇듯 기록된 말씀에 대한 확신과 열정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보호가 되시며 보장이 되신다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분명하게 나타내시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백성들에게도 이것 보라는 듯이 멋진 포즈와 그윽한 표정을 지으며 하나님께 영광 드리는 모습도 보일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이런 그림을 기대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는 모습일 것입니다. 얼마나 멋지고 드라마틱한 공연과 같은 일입니까. 우리는 어쩌면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많이 기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공연하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현실의 삶에서 영성의 사람, 예수님의 사람이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보십시오. 엘리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첫번째 말씀은 우리가 볼 때에 정말 의외입니다. 우리가 기대하던 것과는 너무 다른 진행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일어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열왕기상17:2-4)


도망가서 숨으라고요?!!
일단 ‘여기서 떠나’ 라는 말씀부터가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기록된 말씀에 대한 확신 가운데 나선 것인데 여기서 떠나라니요. 여기서 무엇인가 승부를 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엘리야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인데 절대 권력을 갖고 있는 왕 앞에 나서서 이런 선언을 할 때에는 얼마나 굳은 결심과 결단을 했겠습니까! 여기서 목숨을 걸고 승부를 내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승부를 봐야한다고 생각하는 ‘여기서’ 떠나라 하십니다. 그것도 시골, 인적이 드문 곳에 가서 숨으라고 하십니다. ‘떠나’라는 말도 납득이 안 가는데 계속되는 하나님의 구체적 인도하심의 지침이 ‘떠나, 가서, 숨고’ 입니다. 정말 이상합니다. 그렇게 확신과 열정으로 일어선 사람에게 주신 특별한 메시지의 첫 내용이 ‘떠나, 가서, 숨고’라뇨. 이것은 그냥 해 보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숨어 있는 모습입니다. 그 모습은 어쩌면 실패자의 모습, 도망자의 모습으로 비춰질 수 밖에 없는 인도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그릿 시냇가는 정말 숨기에 딱 좋은 곳입니다. NIV 영어 성경을 보면 그릿 시냇가를 ‘Kerith Ravine’이라고 표현하는데, ‘Kerith’은 ‘그릿’의 영어식 표기이고 ‘Ravine’이라는 것은 일종의 골짜기를 말하는 것인데 깊은 계곡, 협곡입니다. 우리에게 ‘라빈(Ravine)’이라는 것은 익숙하지 않지만 ‘캐년(Canyon)’은 익숙하죠. 바로 ‘라빈’이 폭이 더 넓으면 캐년(Canyon)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냥 보기 좋은 시내가 아니라 좁고 깊은 협곡 아래에 흐르는 시내, 숨기에 안성맞춤인 곳입니다. 
 

그곳에 숨어 있는 것은 승리의 모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비겁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기록된 말씀에 대한 확신과 열정으로 선언한 사람이 아합의 권력이 무서워 도망친 모습으로 비추어지는 것이 ‘떠나, 가서, 숨고’입니다. 정말 내 성격에 안 맞는 일입니다. 내가 기대하는 바와 너무나 다릅니다. 엘리야가 기록된 말씀에 대한 확신과 열정으로 일어나 선언했을 때에 얼마나 결심하고 행동한 일이겠습니까? 이 모든 일들이 우리에게는 이미 일어난 일이고, 이 때부터 진짜 삼년 육개월동안 비가 안 온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니 담담하게 읽을 수 있는 일이지만 아직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은 엘리야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큰 믿음으로 선언하며 나선 일이겠습니까? 그런 엘리야에게 숨으라니요. 정말 힘 빠지는 일입니다. 어차피 북 이스라엘은 왕조가 바뀌어 왔습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관해 오신 일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아합 임금을 제거하시고 이처럼 성경에 대한 확신과 열정의 사람인 엘리야를 왕으로 세우면 간단한 일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그 시냇물을 마시라’고 하십니다. 그릿 시냇가에 숨어서 그 물을 마시라는 말씀인데, 이것 역시 엘리야로써는 납득이 되지 않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릿 시내는 엘리야가 살고 있는 디셉 지역에 있는 시내입니다. 그 시내는 특별히 가뭄이 드는 해가 아니라도 건기가 되면 물이 마르는 시내입니다. 그저 시내의 모습만 갖고 물이 없다가 비 오는 기간인 우기가 되어야 물이 흐르는 시내입니다. 그런 시내를 ‘와디’라고 표현을 합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말이 없으면 비도 이슬도 있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 상태인데 숨는 장소로 그릿 시내, 와디라니요. 그 물을 마시라고 하십니다.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는 엘리야에게 왜 이러시나요? 어디 그 물을 얼마나 오랫동안 마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 생각 같아서는 어디 에덴 동산 같은 곳을 마련해 주시고 그곳에서 푹 쉬고 있으라고 하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까마귀가 먹을 것을 물어다 준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것을 마치 시냇가에 발 담그고 까마귀가 음식 배달하며 서빙해주고 마치 휴가 간 것 같은 느낌으로 접근하면 곤란합니다. 본래 까마귀는 자기 먹이를 건드리면 가만히 있지 않는 새입니다. 무척 영리해서 누가 자기 먹이를 건드리는 지 알고 공격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성경 오경에서 까마귀는 부정한 새에 속하거든요. 하나님께 제물로도 드리는 비둘기나 산 비둘기면 모를까. 음식을 물어다 줄 새가 하필 까마귀라니 엘리야로써는 이것도 받아들이기 거북한 부분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릿 시냇가에 가서 숨으라고 하셨으면 그 옆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나무를 자라게 하셔서 밥과 반찬이 열매로 열리게 하시면 안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 그 인도하심의 일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얼마나 큰 차이를 보이는지요. 우리의 기대와는 너무나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실수하시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어떤 반응을 가져야 할까요? 이렇듯 기대와 전혀 다른 방향의 인도하심에 대하여 엘리야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그것이 세대를 이끄는 기도의 사람이 가져야 할 모습입니다. 
엘리야는 한 마디 반문도 없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특별한 말씀, 그 인도하심의 말씀을 따라 그릿 시냇가에 머뭅니다.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음식을 먹습니다. 이해하기 힘들고 거북한 그 모든 인도하심을 따릅니다. 그는 자신이 기록된 말씀에 대한 확신과 열정으로 일어섰다고 해서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하거나 당연히 받아야 할 대접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어떻게 이러실수 있느냐고’불평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인도하심을 묵묵히 따릅니다. 

 

그것은 겸손한 마음으로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일은 이 모든 인도하심에 겸손함으로 순종하는 일임을 인식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것은 모든 기도의 사람에게 반드시 있어야 하는 훈련입니다. 기록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그 말씀에 대한 확신과 열정을 갖고 움직이는 사람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부분은 그 움직임으로 일어나는 일들 속에서, 그 움직임 후에 주시는 인도하심 속에서 하나님 앞에 겸손함으로 복종하는 훈련입니다. 그것은 되풀이 되어 익숙해지도록 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 복종의 훈련은 우리를 하나님의 전사로 성장시키며 우리의 생명을 지켜줍니다. 
 

흔히 그리스도인들이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에 엘리야 선지자의 까마귀를 통한 공급을 생각하며 무엇인가 기대를 합니다.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던 시기에 근근이 필요한 부분이 채워지는 경험을 가지면서 엘리야 선지자의 까마귀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보내시어 자신의 재정적인 어려움을 해결하셨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 경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며 믿음의 길을 갈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것을 한 몫 잡는 일로,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에게 주시는 보상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것은 재정적인 어려운 시기에 필요한 부분이 근근이 채워지는 것일 뿐입니다. 이런 체험을 주시고, 이런 시간을 갖게 하심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복종의 훈련입니다. 우리는 복종보다 반항에 더욱 익숙하고 그것을 매력적으로 여기며 살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말씀이 임하고 그 인도하심 속에서 예상 밖의 방향과 이해하기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할 때에, 기도의 사람들은 그 시간을 복종의 훈련 기간으로 삼습니다. 

 

우리는 이 시기를 신비한 체험의 시간 정도가 아니라 복종의 훈련 기간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심각한 경우가 생깁니다. 그것은 이 기간을 복종의 훈련으로 삼지 않고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떡과 고기에 매력을 느끼고 거기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심각합니다. 그 심각함에 빠지는 경우가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신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방법으로도 채워 주시는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얼마나 빨리 익숙해지기 마련인지 매일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음식에 감사하며 먹다가 그 신비함이 무뎌집니다. 그러다 갑자기 열이 확 납니다. 그리고는 볼멘 소리로 불평하고 원망하며 말합니다. ‘아니! 왜!! 맨날 이것 밖에 안 주세요?’ 하게 됩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그 물을 마시며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것을 먹는 것은 말씀에 대한 확신과 열정으로 움직였기에 주시는 보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훈련의 현장입니다. 세대를 이끄는 기도의 사람으로 서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 할 순종의 훈련, 성장을 위한 훈련의 자리입니다. 그 훈련은 나의 먹고 사는 부분이 다른 곳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분명히 경험하고 인정하여, 앞으로 진행해 갈 나의 발 걸음을 먹고 사는 것으로 좌우되지 않는 의연한 모습으로 성장하게 만듭니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메시지, 그 인도하심 속에서 복종의 훈련을 가질 때에 우리는 세대를 이끄는 기도의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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