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순교

황해도 최고 악질분자 박경구 나와!” 그래서 아버지가 한 가운데 끌려나왔다.
“이런 놈은 총알이 아까워서 총으로 쏘아 죽일 수 없다.”고 하면서, 아버지의 손과 발을 칼로 토막을 내어 죽였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기관총을 난사하여 죄수들을 다 쏘아 죽이고 불을 놓은 다음, 인민군들이 북쪽으로 퇴각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공산정권에 항거한 것이 “황해도 최고 악질분자”라는 죄가 되었다니!


아버지의 순교 사실을 내가 알게 된 것도 신비한 일이다. 풍문에 내 아버지가 토막토막 잘려서 죽으셨다는 말을 오래 동안 듣고 있었다. 그러나 확인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장신대 학장이 된 직후(1983년 봄)에 한경직 목사님이 나더러 미국 애틀란타에 가서 알라바마 대학 교수인 김영혁 박사를 만나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름 방학에 내 아내와 함께 애틀랜타에 가서 김 박사를 만났다. 그는 황해도 장연읍에서 자랐고, 내 아버지 교회에 출석하며 아버지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아버지에게 영어도 배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 아버지더러 그가 재령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더니, 축하한다고 하시며, 시 한귀를 적어주더라는 것이다. 김 박사는 내 아버지의 시를 암송하고 있었고, 내 앞에서 그것을 자기 수첩 한 페지에 적어서 나에게 주었다. 그것이 아래 사진에 나타난 대로이다.


朴 敬

이 날이 平和의 날
記憶도 새롭근만
아직도 이 땅에는
平和론 곳이 없어
찾고 또 찾으려네
너도 나도 하도다.

두 몸이 서로 合해
못 할 일이 없을 고나.
두 몸이 한 몸 되어
한 집을 이룩하니
온 집안 平和론 봄 바람이
널리 퍼쳐지이다.

높으신 하나님을
一平生 받드러서
理想을 하늘 같이
實行을 힘차게 해
千秋의 남기울 높은 이름
傳해주기 비노라.

그가 나의 아버지의 순교소식을 좀 더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그가 남하하여 미 8 군에서 근무하며 노무자 감독을 하고 있었는데, 노무자 중에 같은 고향 장연 출신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해주 감방에서 내 아버지의 순교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었다. 그는 장연읍에서 폭력배로 있다가 해주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고, 그 마지막 날 처형장에 같이 모여서 장연읍 서부교회 목사 박경구가 순교 당하는 현장을 목격하였고, 그는 완력이 있고, 또 재수가 좋아서, 총에 맞지도 않았고, 불타는 감옥을 빠져나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울에까지 와서 미 8군 노무자로 일을 하다가, 동향 사람 김영혁 감독을 만나서 고향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그의 목격담을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순교의 날이 음력으로 9월 5일이었다는 것은 다른 소스를 통해서 알았다. 장연읍 동부교회 장로이며 장연 일대의 거물이셨던 박상설 장로도 같은 날 처형당했는데, 그 자부되는 사람이 서울에서 나를 만나서 그 날을 알려주었다. 그 날이 양력으로는 어떤 날인지 알 수 없어서 그냥 지나고 있었는데, 김종춘 목사가 컴퓨터로 알아보았다고 하면서 알려주었다. 1950년 10월 15일(주)이라고 한다. 김영혁 박사는 미군 노무자 감독을 하다가 미국 유학의 길이 열려서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출세한 재사였다. 그의 여동생은 장연에서 내 여동생 정연이와 친구이기도 했다. <계속>


박창환 목사(전 장신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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