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조선신학원의 김재준 교수의 신학 노선을 반대하는 학생들과 평양 신학교 재학 중 월남한 학생들을 중심으로 남산의 옛 조선 신사 터에서 장로회 신학교(현재의 총신)가 시작 되었다.

나의 형제·자매

나는 장남이고 내 밑으로 여러 명의 여동생이 있으며 남동생도 한명태어났다. 숙환(淑環)이 나 다음에 태어난 여동생이었는데 일찍 병사하였기 때문에 나는 그를 보지 못했다. 다음에 창연(昶姸), 정연(貞姸), 옥연(玉姸), 주연(珠姸)이 출생했고, 그 다음에 태어난 신자(信子: 왜정 말기에 이름들을 일본식으로 지었다)는 어릴 때 침촌(沈村)에서 병사했다. 해방 후에 남동생 창헌(昶憲)과 혜연(惠姸)이 태어났으며. 혜연은 역시 병사했다는 것이다. 6.25 동란 통에 아버지가 해주 감옥에서 순교의 죽음을 죽으시고. 그 많은 식구를 거느리시고 고생하시던 어머니는 13년을 더 사시다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1980년 대 말에 조동진 목사와 그의 동생이자 내 매제인 동소 목사가 여러 번 북한을 방문하였고, 그들을 통해서 나의 남은 형제들의 소식을 알 수 있었다. 즉 조목사 형제는 그들의 가까운 친척들이 북한에서 공산당 간부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통하여 나의 식구들(조동소의 처가 식구들)의 소식을 수소문한 것이다. 나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 창연과 주연이 황해도 송화 근방에 살고 있다는 것, 옥연과 남동생 창헌은 행방불명이라는 것을 알려왔다.

북한에 남아 있는 동생들을 방문해 보면 어떠냐 하는 의견들을 제기하지만 나는 사양하고 있다. 북한 당국의 방침이 순교자의 가족들은 면담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기에 방북을 해도 그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고, 행여 그들을 만난다고 해도 결국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감시요, 간섭이요, 여러 가지 어려움을 주는 것이 될 것이기에 방북을 자제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때가 오기를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본다.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를 잃고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갔을 때 하나님은 70년이라는 기한을 정해주시며 남은 자들의 귀환을 약속하셨다. 그러면서도 10년을 감하여 60년 만에 귀환하게 하신 역사가 있기에 나는 우리 민족에게도 모종의 계획이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 어쨌든 전능자 하나님의 간섭과 역사(役事)에 의해서만 이 난제가 풀릴 것으로 믿고 하나님의 선처를 기다리는 길 밖에 없다.


신학생들의 시험 부정행위

서울 남산 장로회신학교 시절(1948-1950)에는 의자나 책상이 없이 다다미 방에 앉아서 공부하는 시절이었고, 각종 시험을 칠 때에도 무릎에 노트를 놓고 그 위에 시험지를 놓고 답안을 쓰는 형식이었다. 그 때에는 학생들이 시험부정행위를 하는 것이 내 눈에 발견되지 않았다. 물론 모종의 부정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신학교가 부산에서 피난 학교를 열고 수업을 하던 때(1951년)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그 때도 역시 부산진 교회 본당 마룻바닥에 앉아서 공부하고, 시험도 쳤는데, 학기말 고사 때 시험 감독을 하다가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 반은 1.4 후퇴로 평양에서 부산까지 밀려 내려온 평양신학교 학생들이 태반을 이루고 있는 반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거의 다가 노트를 보든가 남의 것을 보고 쓰는 것이었다. 나는 거기서 깨달은 것이 있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공산주의 속에서 5년을 산 사람들의 심리가 그렇게 많이 변했구나 하는 것이었다. 즉 신앙을 가졌다는 사람들도 모든 것을 속여야만 살아남는 사회 속에 사는 동안 정직해야 한다는 생각이 좀먹어 사라졌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확대해 본다면, 수 천 년 동안 주변 강대국들에게 침략을 받으며 살아온 우리 민족의 심성이 일반적으로 올곧지 못하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계속>


박창환 목사(전 장신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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