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생들의 시험 부정행위

그 후에 장로회신학교가 총회신학교로 이름이 바뀌어 서울로 올라온 후에 사정은 어떠했나? 내가 1954년에 일차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보니, 남산 조선신궁 별관들을 수리해서 교실로 쓰고 있었는데, 이제는 소위 걸상에 앉아서 공부를 하는 체제로 약간 개선되어 있었다. 걸상이라는 것은 기다란 두터운 나무판자에다 다리를 붙인 것으로서, 걸상 하나에 학생 4명 내지 다섯 명이 같이 앉는 것이었다. 책상은 없고 역시 무릎에다 노트를 놓고 강의 내용을 받아 적는 것이었다. 시험을 칠 때가 가관이다. 무릎에 시험지를 받아 놓고, 흑판에 제시된 시험 문제를 보면서 답안을 쓰게 되어 있는데, 눈을 떠서 앞을 바라보면 그 시야(視野)에 옆에 있는 학생의 답안지가 거의 다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눈알을 조금만 돌리면 남의 답안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시험을 감독하는 사람은 학생들의 눈알 돌아가는 것을 주시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고개를 돌리는 사람은 틀림없이 부정행위자로 취급을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에게 부정행위로 적발되어 일 년 간 정학처분을 받은 학생이 몇 사람 있었다.

이제 광나루 시대로 옮겨 본다. 거기는 시설이 많이 발전해서 학생 각자가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거기에 넓은 판자가 붙어있어서, 필기하기가 쉽도록 되어 있다. 시험을 칠 때는, 부정행위를 계획적으로 하는 학생들도 있지만, 대개는 옆 학생의 답안지를 보려고 고개를 돌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고개를 돌리는 각도가 남산시대보다 훨씬 더 클 것이 아닌가 말이다. 광나루에서도 나에게 시험부정 동작이 적발되어 일 년 간 정학처분을 받은 학생이 몇 사람 있다. 약 100 명이 한 교실에서 시험을 치노라면, 적어도 4, 5명 정도는 남의 것을 기웃거리는 학생이 보였다.

한 번은 목회연수원 학생 반에서 “신약성경연구개론”이라는 과목을 가르치고, 필기고사 대신 학기말 과제를 써서 바치게 했는데, 거의 200 명에 달하는 졸업반 학생이 제출한 과제물 중 30여명의 과제물이 서로 꼭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 부정행위를 묵과할 수 없어서, 낙제점수를 주었다. 그래서 30여 명이 그 해에 졸업을 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지방 소속 교회에서는 자기들의 전도사가 졸업을 한다고 단단히 준비를 했다가, 그들이 졸업을 하지 못함으로 여러 가지로 곤란한 지경에 빠졌던 것이다.

1988년 가을 학기였다. 내가 학장 임기를 마치고 미국 콜럼비아 신학교에서 일년간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와서, 마지막 한 학기를 가르치고, 학기말 시험을 칠 때였다. 놀라고 또 놀란 것은, 학생들의 거의 절반이 부정행위를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찌된 일인가? 학생들은 내가 떠나 있는 동안 교내 문제로 거의 매일 데모로 시간을 보낸 것이다. 그들의 마음이 삭막해져 있었고, 도덕심이 그만큼 파괴되어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답답한 심정이었다. 신학교 학생들이 거의 절반이나 시험부정행위를 하고 있는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말이다. 그런 학생들이 지금은 목사가 되어 교회를 지도하고 있는 실정이니, 교회의 앞날이 얼마나 암담한가 말이다.


박창환 목사(전 장신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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