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을 20여일 앞둔 5월 말에 치룬 필자와 예비 신부 현수삼의 약혼식 사진. 2개월여 뒤인 8월 초 전쟁중에 결혼식을 올린 우리 부부는 57년 동안 희로애락을 함께했다.

나의 아내 현수삼(玄受三)

30세가 지나야 결혼하기로 한 나의 결심과 의도는, 최연옥 학생이 영락교회 성가대 친구인 수삼을 소개하자, 모르는 사이에 무너지고 말았다. 수삼이가 예뻐서도 아니고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도 아니었다. 결국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을 정하신 때에 주셨기에 운명적으로, 곧 하나님의 예정에 의하여 짝을 이루게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수삼은 현태룡 목사의 일남 사녀 중 막내로서, 황해도 재령 근처, 해창교회 마당에서 굴레 없는 망아지처럼 거침없이 뛰놀며 자란 규수였다. 아버지 현 목사는 조상으로부터 유산을 넉넉히 받아 그 옛날 상투를 튼 채 서울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신호 신학교에 유학을 하다가 평양신학을 마치신 분이셨다. 재산을 싸 두면 무엇 하느냐? 자식들의 머리에 지식을 넣어주어야 한다고 하면서 땅을 팔아서 자녀들을 공부시키는데 주력하셨다. 독자인 수길(受吉)은 숭실전문학교를 거쳐 동경 입교대학에 유학을 시켰다. “여자가 풍금이나 피아노를 못 치면 꽁지 없는 수탉과 같다”고 하시면서 네 딸을 다 동경, 서울, 평양 등에서 유아교육을 공부하게 하고 악기를 다루도록 지도하셨다. 그래서 수삼도 재령 명신여고를 거쳐 서 서울 경성 보육학교를 졸업하고, 유치원 교사 자격을 가지고 평생 유아교육에 헌신했다. 나와 결혼을 한 후에도 계속 유치원 교사 일을 보고, 또는 유치원을 세우고 소신을 가지고 유아교육에 열중했다.


수삼은 혈액형이 O형이어서 활발하고 자유분방 거침없는 성격의 소지자였다. 성격이 나와는 정 반대여서 때때로 다투기도 했지만, 목사와 교수의 부인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씀씀이가 커서 손님 대접을 잘하고, 부하들이나 교인들 대접하기를 즐겼다. 지도력이 있어서 여전도회를 잘 운영 지도하였고, 그녀가 봉사하는 교회에서는 담임 목사를 무조건 섬기고 돕는데 모범적이었다. 가난한 신학생들을 남 몰래 돕는 일도 많이 하여서, 오랜 후에 당사자들에게 감사의 말을 듣는 것도 여러 번 볼 수 있었다.

아들을 누구보다도 잘 가르치고 키우려는 욕심 때문에 장남 명진이를 어려서부터 가정교사에게 맡겨 놓았던 것이 하나의 실수였다고 할까, 그 아이의 탈선으로 말미암아 수삼은 많은 고통을 겪었고, 그것 때문에 늙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내가 장신대를 은퇴한 후부터는 계속 외국으로 같이 다니었다. 모스크바에서의 만 5년 동안의 삶은 그녀가 치매에 걸리게 한 원인이었다고 생각된다. 모스크바의 치안이 부실하여 밖에 나다니기가 어렵고, 언어가 소통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만 5년을 갑갑하게 지낸 결과 치매 현상이 시작된 것이었다. 미국에 돌아와 디트로잇에서 노인 아파트에서 사는 동안 심장병으로 수술을 한 다음부터 치매기가 급진전하였고, 병상에 누운 지 약 4개 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미시간 주 트로이에 있는 White Chapel 공동묘지에 그 유해가 묻혔다.

아내가 숨을 거둔 것은 2007년 5월 29일 오후 1시 50분이었다.

<계속>


박창환 목사(전 장신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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