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신학박사 학위

나의 아내 현수삼(玄受三)

그녀의 장례식에서 소개된 이력이 아래와 같다.

고 박(현)수삼 권사

1925년 11월 25일 황해도 은율읍에서 현태룡 목사와 김태신 여사의 5 남매 중 막내둥이로 태어났다. 현 목사님이 황해도 해창교회를 목회하실 때, 현 권사는 황해도 재령 명신여고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경기보육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왜정 말기, 교회가 박해를 받을 때 현목사님은 해창교회를 사임하고 둘째 사위 길성운과 아들 수길이 사는 신의주로 이사하였고, 현 권사는 보육학교 졸업 후 신의주 제3교회 부속 유치원 교사로 취임하였다. 해방과 함께 월남하여 서울 명동 계성(啓星) 유치원과 조양(朝陽)유치원에서 봉직하였다.


1950년 6.25 사변 와중에 박창환 목사와 결혼하였고, 1.4 후퇴 시에는 제주도 제주읍 동부교회 유치원 교사로 일했고, 제주도 한림(翰林)교회 부속 유치원을 신설하기도 했다. 정부 서울 수복 후에는 서울 한양교회 부설 유치원을 창설하였고, 이어서 광장동에 광장유치원을 신설하였고 1971년에 부군 박창환 목사가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파송되었을 때에는 사역지인 방까(Bangka) 섬 숭아이리앗(Sungailiat)이라는 소 도시에서 소망유치원(Tamankanakkanak Harappan)을 세워 본토인 아동들을 가르쳤다.


1974년 귀국 후에는 장신대 부속유치원 원장으로 봉사했다. 장신대 학생이 늘어나면서, 자리가 좁아짐으로 인해서, 유치원이 폐쇄되고 따라서 광장교회 부속 유치원을 세우고 1988년까지 봉사하였다.


부군이 러시아 모스크바 선교사로 가 있는 동안, 그 밖의 여러 활동을 하는 동안 내조자로서 훌륭한 역할을 해 주었다. 평생을 교회 봉사(성가대 반주, 유치부 교육 등)와 아동교육에 헌신한 셈이다.


치매를 앓고 있던 중 2007년 1월 10일 심장마비 현상이 있어 수술을 받은 후에 점점 기력이 약해지다가, 5월 29일 오후 1시 50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조용히 그리고 평안히 하나님 앞으로 갔다.


명예신학박사 학위

내가 장신대 학장이 된 다음 해에 나의 60세 생일이 돌아왔다. 회갑(回甲)이라고 해서 동갑내기 주선애 교수와 함께 축하를 받았다. 두 사람을 위한 기념 논문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그 때 누구의 교섭이었는지 모르지만 한국서도선교회 김용옥 장로의 아름다운 휘호가 기념 논문집 서두에 실렸다. 해원상애(解怨相愛)라는 경구(警句)였다. 그리고 김 장로가 나에게 별도로 명구(名句) 하나를 써서 표구(表具)하여 선물로 주셨다. 득의자지 도 여 욱일지 광(得義者之道如旭日之光)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두 점의 글귀 옆에 나를 설명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장로회신학대학장 박창환 신학박사”라고 되어 있다. 나는 명예문학박사 학위밖에 없는데 신학박사라고 잘못 적은 것이다. 그래서 그 글을 볼 때마다 꺼림직하고 남을 속이는 것 같기도 해서 늘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광순 박사가 잠시 학장 서리로 있는 동안 이종성, 주선애, 박창환, 김선태 네 사람에게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주자는 안을 냈고, 김중은 총장이 취임하면서 그 안이 실시되었다. 그래서 나도 신학박사라는 학위를 가지기에 이르렀다. 그 학위수여식이 끝난 후 워커힐 식당에서 이사들과 관계자들이 축하연을 가지면서 나에게도 소감을 말하라고 해서 몇 마디 했다. “지금까지 신학박사가 아닌 사람이 신학박사로 오인되고 있었는데, 오늘은 진짜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니, 그 족자를 볼 때 마음이 떳떳하다”고.


박창환 목사(전 장신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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