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로하니 대통령

이란을 혁명으로 점령한 이맘 호메이니는 신정통치제도를 확립하고 국호를 이슬람이란공화국(Islamic Republic of Iran)으로 바꿨다. 이란은 미국이 쿠제스탄에 건설키로 했던 두 개의 핵발전소 계약을 일방적으로 폐기하고 미국인들을 모두 추방했다. 핵개발을 포기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힘으로 계속 진행하겠다는 속셈이었다. 이란은 자신들이 개발하는 핵발전소는 순수하게 민간전력생산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석유매장량 세계 4위인 이란이 전력 생산만을 위한 목적으로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핵발전소를 건설한다는 데에 서방세계는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이란이 1987년에 파키스탄 핵무기의 아버지라고 하는 압둘 가디르칸을 은밀히 초청하여 핵개발을 추진하였다는 사실은 2005년에야 밝혀졌다. 그러나 그 이전인 2002년 8월에 벌써 NCRI(National Council of Resistance of Iran)라는 재야단체가 이란의 나탄즈에 국제원자력기구에 신고 되지 않은 비밀 우라늄 농축시설이 있음을 폭로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서방세계는 경제 제재를 통해서 이를 저지하고자 했다. 한 때 중동의 맹주요 경제대국이었던 이란은 서방세계의 제재를 당하자 급속한 경제적 압박을 받으며 추락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란은 이슬람 혁명 전 팔레비왕조가 통치하던 시절에는 중동에서 가장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나라였다. 이란 여성들은 주변의 아랍국 여성들이 꿈도 못 꿀 정도의 자유를 누리며 살았다. 유럽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미니스커트는 물론 해변에서 수영복 차림으로 가족 나들이를 즐길 수 있었고, 카바레와 디스코텍에서 자유롭게 술도 마시고 춤도 추었다. 이란 여권을 가지면 전 세계 어느 나라든지 비자 없이 다닐 수 있었다. 주부들이 시장에 가서 맘에 드는 물건이 없으면 장바구니를 들고 공항으로 직행하여 파리나 런던이나 이태리 등 원하는 곳에 가서 시장을 보고 오는 정도였다고 한다. 근로자들은 한 달 일한 돈을 가지면 한 달 정도 세계 여행을 즐기고도 남겨서 돌아올 정도로 풍성한 삶을 살았다.

당시 이란은 한국인들도 선망하는 곳이었다. 1971년 월남전에서 미군의 철수가 시작되자 베트남에 살던 많은 한국인들이 그 당시 지상천국이라고 생각하던 이란으로 몰려들었다. 주이란 한국 대사관은 밀려오는 한국인들을 환영하는 잔치를 하였고, 교민들이 늘어나자 74년 8월에 테헤란 한인교회가 창립되었는데 한 주에 30명 씩 등록했던 기록이 있다. 그 때 한인들의 직업은 정비사나 운전기사가 많았다.


그러나 이맘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 경제는 급속도로 하향곡선을 그리게 되었다. 환율만 놓고 비교해 보면 1979년 혁명 직전 미화 1달러는 70리얄에 거래되었으나, 1984년 핵관련 국제적 경제 제재 후 580리얄이 되었고, 1996년 제재 강화로 1,700 리얄이 되더니 2,000-3,000 리얄로 계속 하락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2005년 6월 아흐마디 네자드가 대통령이 되자 최악의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핵무장이 필요하다며 노골적으로 핵개발을 밀고 나갔다. 그러다보니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도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었고, 그의 임기 초기에 1달러가 9,000 리얄에 거래되었으나 2013년 임기 말경에는 24,000리얄까지 추락하게 되었다.


이 정도가 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이란 국민들은 2013년 대선에서 온건파로 알려진 하산 로하니를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로하니 대통령은 이란의 핵무장에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우선은 경제를 풀고 국제 사회로부터 인정받은 후에 힘을 길러서 나중에 천천히 하자는 쪽이었다.

로하니 대통령은 핵 사찰 수용과 20% 이상 농축 우라늄 생산 금지 등 파격적인 양보를 통해서 결국 2015년 7월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미·중·러·영·프)과 독일을 포함한 6개국으로부터 역사적인 핵협상 합의 서명을 얻어냈다. <계속>


이만석 목사
한국이란인교회 / 4HIM
무슬림선교훈련원

저작권자 © 크리스찬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