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누구냐!” 하면서 혼이 나가도록 놀라는 대화 장면이 이삭과 에서와의 사이에서 일어난 성경에서의 첫번째 백내장 사건이다. 이삭이 나이들어 눈이 컴컴해졌다는 것은 지금 언어로 백내장이 심해서 자식마저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른 것이다. 이로 인한 수 많은 역사의 소용돌이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Calling'(부르심)이라는 단어는 명사형으로 간주 된다. 더불어 동사와 합하면 현재 진행형 동사로 바뀌게 된다. 다시말해서 구속의 원리로 보면 이방인으로 있던 우리가 양자된 구별함으로 바뀌는 것을 부르심으로 개념 정리 된다. 이것을 동사형으로 설명하면 지금 우리가 서있는 자리에서 어떤 사명자로 부르심을 받았는가를 가름하는 사명의 수행으로 가름된다.

지난주 나는 여러 바쁜 일정 속에 1년간 모아 놓은 리스트를 들고 다니면서 짬나는 시간마다 환자들에게 Calling을 하였다. 다름아닌 일년 동안 환자들이 오면 백내장 수술이 필요한 챠트를 준비했다가 계획된 날짜와 장소가 결정되면 수술이 있기 하루 전 밤에 전화를 해준다. 만약에 미리 전화를 하면 수술 환자보다 더 많은 일반 환자들이 몰려와 정작 백내장 무료 수술의 매우 시간적 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참으로 딱한 환자들이 보내어 진다. 하지만 수술을 받지 못하는 자도 있다. 그때마다 마음이 참으로 아프다.

Calling을 하면 전화를 고맙게 받는 이들도 있고, Calling을 해도 연락이 안되는 이들도 많다. 그러면 챠트를 밀쳐 놓고 연락이 닿는 환자부터 Calling을 한다. 그러다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또 다시 Calling 을 한다. 그럴 때 연락이 닿으면 마음이 그렇케도 기쁘다. 연락이 닿지 않으면, 자녀들의 연락처로 Calling을 한다. 어떨 때는 성공적으로 연결이 된다. 그러나 Calling에 응답되지 않는 환자는 결국 이삭과 같은 삶으로 역사의 회오리를 불러오는 후회의 삶이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

나는 여기서 깊은 묵상에 빠지게 되었다. 양자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허나님의 일정에따라 Calling에 순종하는 자가 있고 연락두절인 자도 있다. 과연 나는 어떤 반응을 하고 있는가 명사형으로 부르심을 받고 동사형으로 어떻케 반응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콜링을 받은 환자들 중에는 즉시 반응하여 수술 대기자 명단에 참여키 위해 오전 9시쯤 시작하는 업무에 새벽 5시부터 가족과 함께 줄을 서서 기다리는 애틋함을 나타내기도한다. 수술을 받은 후 고맙다고 쵸코렛 한통을 들고 찾아오는 이들이 드물게 있다. 따뜻하게 그들을 맞으면서 어떤지, 잘 보이는지, 어떻게 사후 관리 해야 되는지 등 또 다른 처방 방법을 일러준다.

여기까지가 우리들이 부름 받은 사명이 전부다. 여기에 어떤 구설도 필요치 않고 그저 한 생명이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한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 되는 것이 우리들의 책임 이기도 하다.

가끔씩 환자들이 전해 주는 소식에 가슴이 아플 때도 많다. 무료 수술을 받으니 줄서서 기다리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순서가 순서가 아니다. 알다시피 여기에서도 힘의 논리는 존재한다. 우리 환자들은 대부분 힘없고 불쌍한 자들이다. 우리들은 이런 환자들을 최우선 순위에 놓고 대기자 명단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정작 수술 당일에는 억울함에 수 없는 피드백 전화를 해서 도와 달라고 아우성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속수무책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이런 형편인지라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가끔씩 상위층에 있는 분들이 자세한 설명으로 저희들에게 피드백 Calling을 해 준다. 그럴땐 묵묵히 들으면서 나 자신을 돌아 본다. 정말 나는 하나님의 Calling에 갑질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알면서 고치지도 않고… 또 다른 갑질을 태연히 걸어가고 있지 않은지를 되돌아 보게 된다.

이삭과 같이 백내장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과오을 저지르지는 않는지? Calling에 응답하지 않는 무책임한 동사형 부르심으로 헛 발질 하지는 않는지…? <계속>

저작권자 © 크리스찬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