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네비우스 선교사(John L. Nevius, 1829-1893)는 1829년 3월 4일 뉴저지 주에서 출생하였다. 유니언 대학과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하고 24세에 북장로교 선교사로 지원하여 중국 선교사로 오랫동안 수고하였다.

61세 되던 해, 그의 중국선교 경력이 37년 되던 해 안식년으로 귀국하던 차 제물포 항을 통하여 서울에 들어와 장로교 선교사들과 2주간 같이 유하며 그가 경험하고 체계화한 선교전략을 나누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소위 말하는 네비우스 정책이다. 세계 선교전략에 있어서 네비우스 선교 정책이 바로 실현되고 성공된 유일한 나라가 바로 조선(한국)이다. 중국의 삼자교회와 공산당 정부가 네비우스 선교사의 선교정책 일부만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적용시킨 점은 심히 유감스럽다.


선교사들이 입국한 지 5년여 지났을 때 효과적인 선교를 위한 정책 수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내조선 선교사들은 거의 전부가 20대 청년들로 선교 경험이나 목회 경험이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일 선교의 풍성한 결실을 얻게 된 것은 선교사들의 열정이 미숙을 극복했기 때문이다.


선교 경험과 동양사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구 조선 선교사들은 1890년 6월, 중국 산둥성 지푸에서 일하던 네비우스를 초빙하여 2주간 선교정책 세미나를 열었다.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로서 1854년 이래로 중국에서 일했던 네비우스가 제시한 선교방법을 '네비우스 정책'이라고 부른다. 네비우스는 1855년 중국에서 사역한 경험을 바탕으로 '선교방법론'이라는 논문까지 발표해 선교계의 이목을 끈 노련한 선교사였다. 그는 2주 동안 서울에 머물면서 '바람직한 선교정책'에 대해 집중 강의했다. 이 정책은 첫째, 자치적이고(Self-Governing) 둘째, 자립적이며 (Self-Supporting) 셋째, 자전하는(Self-Propagating) 토착교회 설립의 원리, 곧 삼자(三自, 3S) 원리를 기본골격으로 하고 있다. 한 마디로 외국선교부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조선인 스스로 교회를 세워갈 수 있는 자생력을 갖게 해야한다는 정책이었다. 혈기로 가득 찬 20·30대 선교사들에게 그가 전한 건 '토착교회를 키우라'는 것이었다.


이후 미국 북장로회의 조선(한국)선교는 크게 변한다. 다른 교단도 동참했다. 무엇보다 선교사들은 '퍼주기 사역'을 지양했다. 토착교회 사역자들은 그 교회의 헌금으로 사례비를 받도록 했다. 학교나 병원 등 건축비가 많이 투입되는 기관을 제외하고 교회를 건축할 때 비용은 자발적인 헌금으로 마련하도록 했다. 이런 원칙은 우리나라 교회가 자립하는 데 좋은 자양분이 됐다. 한국교회가 20세기 들어와 급성장한 배경에도 일찌감치 경험한 자립정신이 한몫한 것은 아닐까. 이 같은 정책이 일사불란하게 적용될 수 있었던 건 외국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이 모두 팀 사역을 했기 때문이다. 누구도 개인행동을 하지 않았고 모두가 선교부의 일원으로 협력했다. '질서 있는' 선교였던 셈이다.


선교사들은 한국어 선생이나 통역관, 안내자 등과 함께 필요한 행장과 기독교 문서, 의약품을 배부하고 전도의 기회로 삼았다. 또 선교부는 한국인 전도자를 채용하여 성경이나 기독교 문서를 보급하게 했는데, 이를 매서(賣書) 전도라고 하고, 이 일에 종사하는 이들을 매서인(賣書人) 혹은 권서인(勸書人)이라고 불렀다. 이런 활동을 통해 신자가 생겨나면 집회를 시작하고 교회가 설립되도록 후원하였다.


선교사들의 순회전도는 공개적전도가 가능해진 1887년 언더우드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서울에서 개성, 황해도 장연군, 평양, 의주 등을 순회한 일이 있다. 그 후의 게일, 마펫, 베어드 등도 동일한 방식을 취했다. 매서 혹은 권서활동은 주한 선교부 외에도 대영성서공회, 스코틀랜드성서공회 그리고 미국성공회에 의해서도 추진되었고, 지역교회 설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사실 이 정책은 네비우스의 독자적인 제안이 아니었다. 이런 선교정책을 제안한 첫 인물은 영국교회 선교회(CMS)의 총무이자, 선교 정책가였던 헨리 벤(Henry Venn, 1796-1873)이었다.


벤은 1841년부터 CMS 총무로 1872년까지 31년간 일했는데, 이미 1854년에 이 정책을 입안하고 토착교회 지도자 훈련을 강조했다. 그는 선교회의 임무는 목회가 아니라 개척이라고 했고, 토착교회가 선교부를 의존하기보다는 자립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선교의 임무는 궁극적으로 토착교회를 설립하고 토착교회가 지도력을 행사하도록 해야 한다는 점에서 3자 원리를 제창했던 것이다.


현지교회가 세워지고 어느 정도 자치할 수 있는 환경이 되면 선교부는 모든 지도력을 현지교회에 이양하고 조용히 물러나야 한다고 보았는데, 이를 벤은 '선교부의 안락사'(the euthanasia of a mission)라고 불렀다.


19세기 중엽 서구인들의 우월의식이나 식민주의 의식(colonial complex)을 고려해 볼 때 벤의 정책은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다. 구미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가능한 한 오래 지도력과 주도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그들은 아직 개화되지 못했고, 자치능력이나 자립여건도 갖추지 않았다고 본 때문이다. 적어도 1910년 에든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협의회(IMC) 이전까지는 대부분 서양 선교단체가 아시아나 아프리카 지역 선교를 '해외선교'(foreign mission)라고 하지 않고 '이교국 선교'(heathen mission)라고 불렀던 점은 이런 인식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벤의 주장은 상당한 비판을 받았으나 되돌아보면 그는 매우 탁월한 정책가였다. <계속>


박흥배 목사
안디옥 세계선교협의회 회장
왈브릿지 열방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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