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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조선, 구한말 미국 선교사 열전 12

Henry Appenzeller (아펜젤러) 선교사

박흥배 목사 | 등록일 2019년08월16일 09시55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Henry Appenzeller (아펜젤러) 선교사
Henry Appenzeller, Feb. 6, 1858 - June. 11, 1902 (Entering Korea in 1885)

 

 

아펜젤러 선교사 선교사 가족(1900년 찍은 사진으로 추정)

 

 

태어날 때부터 아펜젤러 선교사는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다. 그는 1858년 2월 6일 펜실베이니아 주(Pennsylvania) 소더톤(Sadurton)에서 독실한 신자이였던 부모님 아래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메노나이트(Mennonite) 출신의 어머니의 경건한 신앙심과 복음주의 신앙의 가정환경에서 신앙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어릴 때부터 십계명, 주기도문, 사도신경은 물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까지 줄줄 암송할 만큼 대단한 신앙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1872년 임마누엘 개혁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전형적인 장로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아펜젤러 선교사의 인생을 전환시킨 획기적인 사건이 있었다. 무려 3년 동안이나 장로교에서 감리교로 옮기는 문제를 두고 고민하다가 마침내 감리교로 이적을 결심했던 것이다. 이 일은 아펜젤러 선교사가 18세의 나이에 뚜렷한 회심을 경험하고 나서, 그의 신앙을 새로운 차원으로 이끄는 전환점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제 선교사로서의 길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1882년 무수한 인재를 배출한, 랭카스터(Lancaster)의 개혁교회가 운영했던 프랭클린 마샬 대학(Franklin Marshall College)을 졸업하고, 동부의 명문 드루신학교에서 신학과정을 마쳤다. 그리고 1883년 그가 신학교 2학년 재학 중에 참석하게 되었던 ‘신학교 연맹대회’는 그의 가슴을 선교에 대한 비전으로 뜨겁게 만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대회를 통해 장차 조선(한국) 선교의 열렬한 동반자가 되는 언더우드와의 만남을 갖게 되었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원래 선교사로 지망했던 곳은 조선(한국)이 아니라 일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한국)선교를 지망했던 친구 워즈워드(Worthwood)가 어머니의 중병으로 조선(한국)행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언더우드의 만남을 통하여 조선(한국)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마침내 그는 조선(한국) 선교를 향한 결단을 내리고 역사적인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188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북감리교 파울러 감독으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아펜젤러 선교사는 곧장 조선(한국)을 향해 떠났다. 갓 결혼한 사랑하는 아내와 스트랜톤 선교사 가족과 함께 출항하여 2월 27일 일본의 요코하마 항에 먼저 도착했다. 이곳에서 아펜젤러 선교사 일행은 맥클레이 선교사 자택에서 열린 ‘제1회 조선(한국) 선교사 회의’에 참석하게 된다. 바로 이 회의가 감리교 조선(한국)선교회에 정식으로 조직됨으로써 향후 조선(한국)선교의 장을 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일본에 머무는 동안 아펜젤러 선교사는 틈나는 대로 조선(한국)어를 습득하고, 조선(한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면서 조선(한국)선교를 위한 준비를 꾸준히 하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조선(한국) 땅을 향해 배를 타고 떠났으며, 1885년 4월 5일 부활 주일 오후 3시에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그토록 꿈에 그리던 선교지를 밟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그 당시 갑신정변으로 인해 혼란에 휩싸였던 조선(한국) 땅에서 미국 공사 폴크는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에게 일본으로 돌아갈 것을 권고하였다. 선교지에 첫 발을 내딛은 감격이 가시기도 전에,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는 일주일 만에 다시 돌아가야 했다. 그는 일본에 2개월 동안을 머물며 기회를 엿보다가 국내정치가 안정된 6월 16일에 다시 조선(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막힌 줄만 알았던 조선(한국)선교의 문은 그때부터 열리기 시작했다. 조선(한국)에 들어온 아펜젤러 선교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한 일환으로 조선(한국)에서 교육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가 시작한 학교는 고종으로 부터 ‘배재학당’(유능한 인재를 기르는 학교)이라는 학교 명을 하사 받았다.

 

그때부터 그의 선교 사역은 언더우드 선교사와 더불어 눈부신 열매와 업적들을 조선(한국) 땅에 남기게 되었다. 정동에 자리잡은 아펜젤러 선교사는 8월 3일 두 학생과 함께 영어 학교를 만드는 일부터 시작했고 나중에는 학교 설립과 신학교육, 연합선교, 성경번역 그리고 문서 선교에 이르기까지 놀라운 사역을 이루게 된다. 그 중에서도 정동제일감리교회와 배재학당의 설립 그리고 한글성경의 번역은 그가 남긴 가장 값진 유산으로 기억되고 있다. 배재학당에는 점차로 복음의 능력이 퍼져서 많은 학생들이 세례를 받고 기독교의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배재학당 안에 ‘협성회’라는 토론회를 조직하고 독립협회의 서재필, 윤치호 등을 강사로 초청해서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와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그는 복음의 능력이 개인의 구원에 국한되지 않고 고난 당하는 민족을 위해서 봉사하는 데까지 확장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조선(한국) 감리교의 초석을 놓은 선교사이기도 하다. 1887년 10월 아펜젤러 선교사는 벧엘이라고 이름 지어진 집에서 감리교 최초의 공중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1897년 12월 26일 성탄 주일에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벧엘 예배당의 헌당식을 드렸다. 이때 아펜젤러 선교사는 10년 전 벧엘에서의 첫 설교를 반복하였다. “나는 성탄절 날, 10년 전인 1887년 성탄절에 조선(한국)에서 감리교 목사로서 처음 시도한 공식 설교를 되풀이했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가로 8자 세로 12자의 한 조그마한 방에서 예배했지만, 지금부터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성별하여 바치려는 이 아름다운 성전에서 예배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 나라에서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출판 분야에서도 두드러진 공헌을 하였다. 배재학당 안에 올링거 선교사가 만든 삼문출판사라는 인쇄소에서, 기독교 소책자들과 <독립신문>등 일반신문을 인쇄하였다. 또한 아펜젤러 선교사는 언더우드, 스크랜턴과 더불어 성경번역위원회를 최초로 조직해서 한글성경번역에도 상당한 공헌을 하였다.
 
이렇게 다양한 활동으로 조선(한국)을 섬기던 아펜젤러 선교사는, 1902년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가던 중 배가 침몰하면서 순직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44살이었다. 조선(한국)에 27살 때 들어왔으니 17년 동안 선교사로 일한 것이다. 그는 자신과 함께 동승했던 조선(한국)인 비서와 어린 조선(한국) 소녀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자기 목숨은 돌보지 못했던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을 돌보지 않고, 조선(한국)인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고 떠난 선교사였다. 이렇게 조선(한국)에서의 17년의 세월을 불꽃같이 살다가 떠났지만, 그의 선교의 열매들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이 땅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아펜젤러 선교사의 자녀들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조선(한국)에서 일평생 교육선교사로 헌신하였다. 아들 아펜젤러 선교사 2세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배재학당의 교장과 이사장으로 일하였으며, 딸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 선교사도 이화학당장을 맡아 1925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승격시키고 초대 교장이 되어 섬겼다. <계속>

 


박흥배 목사
안디옥 세계선교협의회 회장

왈브릿지 열방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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