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된 헐버트 선교사의 묘비

Homer B. Hulbert (호머 헐버트 할보(轄甫)) 선교사 ②

Homer Bezaleel Hulbert, Jan. 26, 1863 – Aug. 5, 1949 (Entering Korea in 1886)

1890년대 중엽에 조선은 일본제국으로부터 위협을 겪게 되는데, 헐버트 선교사는 일제의 이러한 침탈행위를 목격하면서 조선의 국내 및 국제 정치, 외교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조선의 자주권 회복 운동에 헌신하기 시작한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헐버트 선교사는 고종을 호위하고, 최측근 보필 역할 및 자문 역할을 하여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해왔다. 헐버트 선교사는 고종의 신뢰를 가장 많이 받은 외국인이었다.

헐버트 선교사는 1903년부터 타임스의 객원 특파원을 지냈으며, 1904년에는 AP 통신의 객원 특파원을 지냈다. 그는 러일전쟁을 깊이 있게 취재하여 송고하였다.

1905년,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 사건이 있은 후에 헐버트 선교사는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무효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려 했으며,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또한 을사늑약의 무효성을 알리기 위해 고종 황제로부터 친서를 받아 1905년 미국 대통령에게 밀서를 전달하고자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했으며, 미국을 비롯한 열강의 국가들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907년 고종의 밀서를 받아, 비밀리에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에 비밀 특사 3명들을 파견하는데 크게 일조하기도 했다.(헤이그 특사 파견을 위해 통감부의 감시속을 피해 사전 작업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로 인해 헐버트 선교사는 제4의 특사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일본 제국의 방해로 헤이그 특사들은 회의장에 입장조차 못했으며, 결국 실패로 끝나자 이것이 일본제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를 빌미로 일본제국은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던 헐버트 선교사를 대한제국에서 추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헐버트 선교사는 미국에서 서재필, 이승만 등의 미주 독립운동가들에게 적극 지원하여 활동에 힘을 보탰으며, 조선(한국)의 분리독립을 위해 미국 각지를 돌면서 일본제국의 침략행위를 비난하였고, 조선(한국)의 분리독립성을 호소하였다.

1907년 7월 헤이그 평화 클럽에서 일본의 부당성을 질타한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1908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스프링필드에 정착하여, 스프링필드 훼이스 회중교회에서 목사로 안수받았다. 그는 미국 전역과 전 세계에 각종 회의와 강좌에서 일본 제국의 침략을 규탄하였고 조선(한국)의 분리독립에 관한 글을 썼으며, 1918년에는 파리 강화회의를 위한 '독립청원서'를 여운홍과 함께 작성하였다. 그는 1919년 3·1운동 후에는 이를 지지하는 글을 서재필이 주관하는 잡지에 발표하였고, 미국상원 외교위원회에 일본의 잔학상을 고발하였다. 1942년에는 워싱턴 D.C에서 열린 조선(한국)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1944년 그는 '조선(한국)문제연구회'에서 간행하는 '조선(한국)의 소리'라는 책자에서 띠어도어 '테디' 루즈벨트 대통령이 을사조약 직후 고종황제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아 동양의 역사가 바뀌었고, 미국이 친일 정책을 썼기 때문에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패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반도는 독립되었고,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된 이듬해인 1949년 42년 만에 방한하였다. 방한 이후 1주일 후에 헐버트 선교사는 병사하여 8월 11일에 최초의 외국인 사회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하였고 오늘날 양화진(楊花津)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그의 첫째 아들 쉘던은 2살 때 사망하여 이미 양화진에 묻혀 있었다. 헐버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민국으로 떠나며 언론에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조선(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계속>


박흥배 목사
안디옥 세계선교협의회 회장
왈브릿지 열방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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