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bert A. Hardie (하디, 하리영) 선교사

Robert A. Hardie, June 11, 1865 - June 30, 1949 (Entering Korea in 1890)

로버트 하디(R. A. Hardie, 1865-1949 하리영) 선교사는 1865년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서 출생했다. 그는 고향에서 대학까지 마친 후 고등학교에서 잠시 교사로 일하기도 했지만, 곧 의사가 되어 병든 이웃을 돕겠다는 큰 뜻을 갖고 토론토대학 의학부에 진학했다. 그리고 대학 2학년 때 무디 선생이 설립한 '기독교 외국선교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선교사의 꿈을 가지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된 하디 선교사는 켈리(M. Kelly)를 만나 결혼하고, '캐나다 대학생선교회'의 지원을 받는 선교사로서 8년간의 사역을 목적으로 같은 해 가족과 함께 부산에 도착하였다.

하디 선교사는 부산에서 게일 선교사와 함께 사역하다가 상경하여 제중원에서 에비슨 선교사와 함께 몰려드는 환자를 진료했다. 이때 하디 선교사는 상당수의 죽을 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하여 살렸고 그로부터 서양의사와 기독교에 대한 호감이 사회에 전파되었다. 1892년, 부산에 의료진이 부족하다는 요청에 따라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서 1년 동안 진료하던 중에 8년간의 후원계약이 끝나게 되었다. 하지만 곧 때를 맞추어 감리교 원산 선교부의 초청을 받음으로써 미국 남감리교회 소속 선교사로 남게 되었다.

감리교 원산 선교부에서는 강원도 지방까지 맡아 선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활동무대는 광활해 졌다. 그는 1901년 10월에 강원도 동해안 지역 일대에서 선교하면서 15명을 전도해서 교회를 설립했다. 15명이라는 결코 적지 않은 사람들을 전도하여 가르치면서 교회를 설립했지만 한편 그는 자신이 영적인 면에서 연약했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나는 3년 동안 미국 남감리회가 세워진 동해안지방에서 애써 사역을 했지만 선교 사업에 실패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만큼 그에게는 성령 하나님의 임재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러던 차에 1903년 8월, 그는 여름휴가도 포기한 채 갈급한 마음으로 원산에서 다른 7명의 선교사들을 모아 중국 감리교소속 화이트(Miss M. C. White) 선교사를 강사로 초빙하여 사경회를 개최했다. 이때 하디 선교사는 새로운 성령체험을 하게 된다. 하디 선교사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성령이 내 안에 충만하게 내재하심을 경험했으며 나의 부끄러움과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과 믿음의 부족함과 모든 잘못을 자복했습니다. 나의 이런 자복은 회중에게도 강한 영향을 미쳐 강한 죄의식과 믿음의 부족함을 비로소 깨닫고 모두가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원산 성령운동의 불씨가 되어 1907년에는 마침내 평양대부흥운동의 큰 불을 일으켰고 전국으로 번져 확산되었다.

하디 선교사는 각 지역에 모이는 선교사들을 대상으로 자신이 받은 성령의 체험을 소개했다. 이 일로 하디 선교사는 더욱 유명해졌다. 그는 장로교, 감리교 구분 없이 각 교파의 초청을 받아 강의했으며, 1909년에는 감리교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가 교장이 되면서 요한 웨슬레의 회심과 그의 성령운동에 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이로 인해 감리교 협성신학교는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되었다. 그는 1916년에 최초로 감리교 협성신학교 교수 논문집인 <신학세계>를 창간하는 데 공헌했다. 이 논문집은 감리교가 조선(한국)에 요한 웨슬리를 소개하는데 크게 기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1935년 4월, 45년간의 조선선교 사역을 마감하고 떠나는 날 두 딸이 묻혀 있는 양화진을 찾아 마지막 고별인사를 했다. 하디 선교사는 1893년 8월 9일에 딸을 얻었지만, 하루 만인 8월 10일에 딸은 주님 곁으로 갔다. 그 후 1903년 9월 1일에 둘째 딸을 얻었지만, 둘째 딸 역시 1909년 여섯 살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양화진에 묻혔다. 당시 하디 선교사 부부는 동료 선교사들의 위로를 받으면서 양화진에 두 딸의 시신을 안장했다. 자신의 젊음과 재능뿐만 아니라 가족마저도 조선(한국)을 위해 바친 하디 선교사를 볼 때 하나님께서 이땅을 얼마만큼 사랑하시는지 깨닫게 된다.

“감리교회 하디 선교사는 1903년 원산부흥운동의 위대한 불씨를 지피었던 사람이다. 당시의 불길이 점점 번져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촉발시켰으며, 마침내 조선(한국)교회 전체로 확산되었던 영적대각성운동을 이끌어 낸 주역이 되었다. 이제 조선(한국)교회가 위대한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을 맞아 다시 영적대각성운동의 불길을 사모하고 그가 이땅에 남기고 간 사랑하는 두 딸의 흔적을 기억하면서 이 비를 세워 역사의 뜻을 기리고자 한다.” 2006년 5월 24일.

위의 글귀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된 하디 선교사의 두 딸 묘지 앞에 새겨진 묘비 명이다.

흥미로운 점은 하디 선교사 내외가 조선(한국)을 떠나 고향인 캐나다로 돌아가지 않고 오하이오(Ohio) 주 톨레도(Toledo)에 몇년간 머물다가 미시간(Michigan) 주 랜싱(Lansing)에 살다가 소천한 후에 랜싱에 있는 묘지에 묻혔다는 점이다. 미시간 주 랜싱은 필자가 사는 톨레도에서는 두시간 거리이다. 건강이 허락하는 대로 하디 선교사가 잠들어 있는 묘지를 가 볼 생각이고 왜 톨레도에, 그리고 랜싱에 정착한 이유를 연구해 볼 셈이다. <계속>


박흥배 목사
안디옥 세계선교협의회 회장
왈브릿지 열방교회 담임목사

저작권자 © 크리스찬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