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setta Hall (로제타 홀) 선교사 ①
Rosetta Sherwood Hall, 1865 - 1951 (Entering Korea in 1890)

25살 처녀 의사 로제타 셔우드 선교사가 조선 땅을 밟은 것은 1890년 10월이었다. 메리 스크랜턴이 남자 의사들에게 몸을 보일 수 없었던 조선 여성들을 위해 세운 보구여관(保救女館)의 두 번째 의사로 파견된 것이었다. 그녀가 다녔던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Pennsylvania Women's Medical School)은 1850년 퀘이커(Quaker)들이 세운 세계 최초의 여자의과대학이었다. 1765년 펜실베이니아 대학(U Penn)이 의대를 설립한 후 100여 년 동안 미국 내 의대에서는 여성들의 입학을 허용하지 않았다. 열아홉 살 처녀 교사 로제타 선교사는 어느 주일에 인도에서 일하던 여성 선교사의 강연을 들었다. 그녀는 심한 여성차별로 여성들이 남자 의사들의 진료를 받을 수 없는 인도의 현실을 말하며 의료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로제타 선교사는 즉각 의료 선교사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로제타 선교사가 진학한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은 해외 의료선교사들의 메카였다. 그녀가 입학할 당시 해외선교가 봇물을 이루던 시기였다. 해외선교가 정점이었던 1915년에는 각 교파 여성해외선교회의 회원은 300만명이 넘었다. 당시 미국 인구는 1억50만 명이었다. 교인들의 후원으로 급여를 받고 생활했던 여성 해외 선교사들은 외국에서 학교를 짓고, 해당 지역 여성들을 가르쳤으며, 아픈 육신을 치유하기 위해 병원도 지었다.

1889년 3월 대학을 졸업한 후 로제타 선교사는 뉴욕에서 인턴을 거쳐 빈민가의 무료진료소에서 봉사했다. 이 무렵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에 지원서를 접수했다. 나중에 남편이 된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 Hall)도 이때 만났다. 윌리엄은 로제타 선교사가 5년간의 계약을 맺고 조선으로 떠나는 것을 안타까워했으나 현실을 자랑스럽게 받아들였다.


로제타 선교사가 조선에서 일했던 보구여관(保救女館)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병원이다. '보호하고 구하는 여성들의 집'이라는 뜻으로 명성황후가 이름을 하사했던 곳이다. 이 병원은 1887년 메타 하워드(Metta Howard)라는 여의사가 파견되면서 문을 열었다. 2년 후 그녀가 병으로 귀국한 후 로제타 선교사가 후임이 된 것이다. 이곳은 현재 서울 정동의 이화여고 부지로 미국 북감리교의 해외여성선교회의 한양 지부(支部)의 본거지였다. 병원과 이웃해서 기숙학교인 이화학당과 선교사들의 주거공간도 붙어 있었다.


로제타 선교사는 1890년 10월 14일 이곳에 도착해 바로 다음날부터 진료에 들어갔다. 일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로제타 선교사는 간호사도 약제사도 없이 환자의 맥박을 재고, 체온을 재고, 진찰을 하고, 약을 조제하고, 수술을 하는 일들을 도맡아 처리했다. 끝없이 몰려오는 환자들이 호소하는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이비인후과, 피부과, 치과, 정신과 등의 온갖 질병과 씨름해야 했다. 로제타 선교사가 행한 수술은 자궁수술을 비롯해 종양 제거, 백내장 수술, 언청이 수술, 종기 수술 등이었다. 로제타 선교사는 첫 10개월 동안 2359건의 진료를 했다. 왕진이 82건, 입원 환자는 35명 이었다. 처방전 발행건수는 6000여 건이었다.


로제타 선교사는 언어 문제로 인해 이화학당의 교사 로드 와일러(Rhode Wiler)를 통역으로 썼다. 열흘 후, 로드 와일러가 독감에 걸리는 바람에 점동(박에스더·최초의 조선(한국)인 의사)에게 통역을 하라고 했다.
이화학당의 소녀들 중에서 영어를 가장 잘하는 아이였다. 로제타 선교사가 본 조선 여성들의 현실은 '공포스러울 만큼' 비참했다. 당시 여성들에게는 이름도 거의 없었다. 가난과 가부장제에 찌든 여성들, 열여섯이 되기 전에 얼굴도 한 번 보지 못한 남자와 결혼해야 하는 소녀들에게 로제타 선교사는 강한 연민을 느꼈다. 로제타 선교사는 이런 현실에서 에스더(점동)가 결혼을 하지 않고 자신과 함께 일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은 조선의 관습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아야만 인간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 조선 여성들에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이었다. 로제타 선교사는 2년 동안 세심하게 에스더의 신랑감을 모색했고, 에스더에 비해 많이 부족하지만 심성 좋은 박유산을 신랑감으로 택해 결혼을 주선했다.


로제타 선교사가 조선에 온 이듬해에 약혼자 윌리엄 제임스 홀이 조선으로 부임했다. 거기에는 사연이 있다. 원래 약혼자 윌리엄은 중국 선교사로 파견될 예정이었다. 윌리엄은 자신이 중국으로 갈 때 로제타 선교사를 데려가려 했다. 이런 사실을 마침 안식년으로 뉴욕에 가 있던 메리 스크랜턴(Mary Scranton)이 알게 됐다. 그녀는 로제타 선교사를 뺏기지 않기 위해 선교회에 로비해서 윌리엄을 중국이 아닌 조선으로 파견하도록 했다. 두 사람은 1892년 6월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윌리엄은 감리교의 평양선교 책임자로 임명됐다. 이때부터 불과 2년남짓 지속된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만남과 헤어짐이 교차하는 안타까운 시간이었다. 윌리엄은 평양에서, 로제타 선교사는 서울에서 조선 일을 돌봤다.


이 무렵 1893년 3월에 로제타 선교사는 동대문 옆에 볼드윈 진료소를 개설했다. 한양에 온 직후부터 로제타 선교사는 낮에 돌아다니지 못하는 여성들을 위해 밤에도 진료소를 열었고, 성(城) 밖에도 진료소를 개설하고 싶어했다. 동대문 진료소는 성 밖의 가난한 여성들이 찾아오기에 용이했다. 이 병원은 후에 동대문 부인병원, 해방 후에는 이대부속병원이 됐다.
1894년 5월 8일, 로제타 선교사는 남편이 있는 평양으로 갔다. 이때 에스더 부부를 데리고 갔다. 당시 개항장을 제외하고는 외국인의 거주나 자산을 보유하는 것이 금지됐다. 처음으로 평양에 나타난 서양 여성과 그녀의 아기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평양에 도착한 다음 날, 이들을 보러 몰려든 사람들이 1500여 명이었다고 한다. 당시 평양감사는 이들의 이주(移住)를 위협적으로 받아들였다. 외국인들을 직접 감금하는 일은 민감한 일이었기에 조선(한국)인 조력자들을 대신 수감하고 박해했다. 로제타 선교사를 도운 조선(한국)인 몇몇이 구속됐다. 3박4일 동안의 피 말리는 시간 끝에 이들은 모두 석방됐다. 로제타 선교사는 이때 구속되었던 이들 중의 한 사람인 오석형에게 시각장애인 딸이 있음을 알게 됐다. 조선에 와서 장애인들의 현실에 가슴 아파하며 그들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던 차였다. 로제타 선교사는 어린 시절 점자(點字)를 배운 기억을 되살려 한글 점자를 개발하고자 했다.
이때 전문지식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안타깝게도 청일(淸日)전쟁의 전운이 몰려왔고 한 달여 만에 이들은 모두 서울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계속』

박흥배 목사
안디옥 세계선교협의회 회장
왈브릿지 열방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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