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setta Hall (로제타 홀) 선교사 ②

Rosetta Sherwood Hall, 1865 - 1951 (Entering Korea in 1890)

1909년 평양 청각장애 학교에서

1894년 10월 1일, 남편 윌리엄 선교사는 부랴부랴 평양으로 돌아갔다. 치열한 전투를 치른 직후의 평양은 전염병이 돌고 부상자들이 넘쳐났다. 불행히도 이들을 치료하던 도중 윌리엄 선교사는 발진티푸스에 감염돼 11월 19일 서울로 돌아온 후 일주일도 못 버티고 11월 24일 아내 곁을 영원히 떠나고 말았다. 그의 나이 서른넷이었다. 둘 사이에는 돌을 갓 지난 아들 셔우드가 있었고, 둘째가 그녀의 몸 속에 자라고 있었다. 로제타 선교사는 남편의 장례를 치른 후 고향으로 돌아가 둘째를 출산하기로 했다. 다시 돌아오겠다고 다짐하며 떠나는 그녀의 귀향길에 에스더 부부가 동행했다.


로제타 선교사는 1895년 1월 14일에 고향집에 도착했고, 나흘 후 딸 이디스(Edith)를 낳았다. 이디스는 건강하고 총명했다. 아버지가 없는 두 아이들을 데리고 평양으로 돌아오는 데는 많은 고민이 따랐다.
로제타 선교사는 뉴욕에 있는 사이 남편의 사망으로 위로금을 받았다. 그녀는 이 돈을 평양에 남편을 기념하는 기홀병원을 짓는데 쓰고자 마음 먹었다. 한글 점자를 개발하기 위한 체계적인 공부도 했다.

2년 뒤인 1897년 11월, 로제타 선교사는 아이들을 데리고 제물포항에 내렸다. 그 무렵 박에스더는 미국에서 의대에 다니고 있었다. 이듬해 5월 1일, 로제타 선교사는 부푼 꿈과 두 아이를 안고 다시 평양에 들어갔다. 그런데 짐도 풀기 전에 세 사람 모두 이질에 걸렸다. 로제타와 아들은 회복했으나 딸 이디스는 어린 나이에 엄마의 품을 떠나야 했다. 로제타는 아픔을 잊기 위해 미친 듯이 일에 매달렸다. 곧바로 진료소를 열었다. 개원 직전 평양감사의 부인을 치료해 준 덕에 감사는 광혜여원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기홀병원과 광혜여원은 후에 통합돼 평양연합기독병원이 됐다.
로제타 선교사는 이 병원에 이디스를 기념하는 어린이 병동을 추가로 건립했고 이곳에서 맹아들을 위한 교육도 시작했다. 1897년 겨울 동안 서울에 머물며 초급 한글 교리서 등을 점자 교재로 만들어 평양에 다시 돌아왔다. 로제타 선교사는 오지(奧地)를 돌며 의료 선교 여행도 다녔다.

로제타 선교사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아무리 일에 매달려도 딸을 잃은 아픔이 가라앉지 않았던 것이다. 딸 이디스가 떠나고 2년 후 친정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결국 로제타 선교사는 신경쇠약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고향으로 돌아가 요양을 마치고 돌아오는 여행의 동반객 중에는 감리교 첫 정식 간호사 선교사 마거릿 에드먼즈(Margaret Edmonds)가 있었다. 이들은 여행 도중 조선(한국)어를 함께 공부하고 간호사 양성학교 건립도 계획했다.
1903년 말에 마거릿 에드먼즈는 보구여관 간호학교를 개교했다. 첫 학생이었던 이 그레이스는 여종 출신으로 다리에 생긴 괴사병으로 주인한테 버림받고 보구여관에 왔던 소녀였다. 그녀는 우리나라 첫 정식 간호사가 됐고 후에 광혜여원에서 로제타 선교사로부터 산과(産科) 훈련을 받아 의생면허를 취득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개업의가 됐다. 의생제도는 부족한 의사를 충족하기 위해 총독부가 만든 제도였다.

1890년 로제타 선교사는 미국을 떠나 조선으로 오는 도중 이 나라 소녀들에게 의학교육을 시키겠다는 계획을 자신의 일기장에 적었다. 그녀는 점동과 오와가를 시작으로 이듬해 겨울부터 이화학당의 소녀 다섯 명을 데리고 생리학 수업을 시작했고, 곧 약리학 수업을 추가했다. 로제타 선교사는 이들을 '내 아이들(my girls)'이라 불렀다. 최초 양의사 박 에스더는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최초 간호사 이 그레이스, 진명여고 설립에 크게 기여한 여메례, 선교사역 동반자 노수잔 등이 로제타 선교사의 '아이들'이었다.

1903년 조선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장학금을 마련하고 영특한 소녀들을 뽑아 중국, 일본에 유학을 보내 의사로 양성했지만 그 수는 미미했다. 로제타 선교사는 좀 더 많은 수의 의사를 양성하기 위해 1912년 광혜여원 안에 실습을 병행하며 의학강습반을 열었다. 그리고 이들을 의전(醫專)에 입학시키려 애를 썼으나 선교사들이 세운 세브란스 의전에서조차 여학생 입학을 거부했다. 로제타 선교사는 이 일에 크게 실망하고 격분했다. 남자들의 이기심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총독부에서 운영하는 경성의전에 사정해 간신히 청강생으로 1년에 몇 명씩을 입학시킬 수 있었다. 1918년에 이들 중에서 세 명이 처음으로 조선에서 교육받고 의사 자격증을 얻었다. 하지만 경성의전은 1926년부터 여학생의 청강을 다시 불허했다. 로제타 선교사는 여자의전을 만들기로 하고 조선(한국)인 의사들을 설득했다.
그리하여 1928년 60여 명의 조선인 유지들과 조선여자의학전문학교 창립을 발기했다. 이 학교가 발전을 거듭하여 현재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이 됐다.

제임스 홀의 별세로 28살에 미망인이 된 로제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 선교사와 아들 셔우드 홀은 1895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남편의 숭고한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고자 미국에서 모금운동을 펼쳤고 점자를 익힌 후 1897년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그 모금액으로 병원 설립을 추진하였다. 마침내 1897년 2월 평양에서 최초의 근대식 병원으로서 홀 의사를 기념하는 <기홀(紀忽)병원>이 설립되었다. 이 시기에 사랑하는 딸(에디스)을 이질로 잃는 등의 고통 속에서도 로제타 선교사는 병원 일에 헌신하였다. 또한 맹인 농아학교 설립, 점자도입과 한글용 점자개발, 어린이 병동설립, 서울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설립(현 고려대 의대), 동대문병원(현 이화여대부속병원), 인천기독교병원, 인천간호보건대학 등을 설립, 또는 시작했다. 그리고 김점동(박에스더)이라는 한국(조선) 여성을 미국으로 데려가 의학 교육을 시켜, 1900년 박에스더는 조선(한국) 최초의 의학박사가 되었다. 이렇게 43년이나 지속된 그녀의 헌신으로 기홀병원은 수많은 조선(한국)인의 영육을 구원하는 북부지역 선교의 중심 기지가 되었다.
말년에 은퇴한 로제타 선교사는 미국으로 귀국해 1951년 뉴저지(New Jersey)주 오션 그로브(Ocean Grove)에서 별세했으나 고인의 유언에 따라 현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잠들어 있다. <계속>

박흥배 목사
안디옥 세계선교협의회 회장
왈브릿지 열방교회 담임목사
revpark00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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