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rwood Hall, 10 Nov 1893 - 1991

(Born in Seoul, South Korea)

셜우드 홀(Sherwood Hall) 선교사는 선교사인 아버지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 忽)과 어머니 로제타 셜우드 홀(Rosetta Sherwood, 許乙) 사이에서 태어났다. 셜우드 홀은 서울에서 1893년 태어나 1900년 6월 외국인 학교 첫 입학생이 되어 1908년까지 수학했다. 1907년 조선(한국)의 평양 대부흥 운동은 어린 셜우드 홀 선교사에게 큰 영향을 끼쳤는데 그의 일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닥터 하디(R. A. Hardie)의 설교는 어린 내 가슴에 큰 파문이 되어 깊이 새겨졌다. 그때 나는 서양으로 돌아가 사업가가 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내 인생에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가졌던 그날 예배 후 의료 선교사가 되어 조선(한국)으
셜우드 홀 선교사 내외
로 돌아와 일하겠다고 결심했다. … 1907년 하디는 조선(한국)에 '대부흥'을 일으켰다. 그 시기에 수 천 명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왕국으로 들어왔다. '은둔왕국'의 새 기독교 신자 가운데 한 백인 소년도 있었다. 그가 바로 '나'였다.” - 셜우드 홀, 김동열 역, 『닥터 홀의 조선회상』, 서울, 좋은 씨앗, 2003, 232.
셜우드 홀 선교사는 어머니가 “전 세계 선교사 회의”에 대표로 파송되자 동행하여 시베리아와 유럽을 거쳐 미국의 메사추세추(Massachusetts) 주의 무디(D. L. Moody) 선교사가 세운 마운트 허먼(Mount Hermon) 학교를 거쳐, 1919년 오하이오 주 얼라인스(Alliance) 시 마운트 유니언(Mt. Union University) 대학을 졸업하고 1922년 매리언과 결혼했다. 1923년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24년 뉴욕(New York) 롱아일랜드(Long Island)의 홀츠빌 서포크 결핵 요양소(Holtsville Suffolk Tuberculosis Clinic)에서 결핵을 전공했다. 1925년 8월 미국 감리회 의료 선교사로 임명되어 1926년 4월 19일 부인 매리언 버텀리(Marian Bottomley)와 함께 내한하였다.
셜우드 홀 선교사는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 조선(한국)에 결핵 요양소를 세울 것을 결심한 바 있었다. 1910년 당시 10대 소년이었던 셜우드 홀 선교사는 어릴 적부터 이모처럼 따르던 박 에스더(김점동, 볼티모어 여성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한국 여성 최초의 서양의사가 됨, 1910년 4월 13일 서울의 병원에서 34살의 짧은 생애를 마감)가 결핵에 걸려 죽는 것을 보고 결핵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어 한국에 결핵 요양원을 세우고 결핵 퇴치에 앞장서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공부를 마치고 선교와 의료사업을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공중집회를 허가받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심한 반대로 사업에 장애를 주던 한 사람이 병색이 완연한 한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아왔다. 결핵이었다. 이 아이를 고치는 것은 선교 사업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좋은 기회였다. 소년은 건강을 되찾았고 집회 허가는 수월하게 얻을 수 있었다. 결핵요양소로서 해주병원은 기초가 잡혀갔다.
결핵 요양원의 필요성에 대하여 셜우드 홀 선교사는 “결핵은 다른 나라에서는 20명에 한 사람 꼴인데 조선(한국)에서는 5사람 중 한 사람 비율로 희생자가 난다. 일단 병균이 침투하면 조선(한국)인은 병을 피할 수 있는 희망이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결핵은 불치의 병으로 <부끄러운 병>이며, 악귀의 기분을 상하게 한 사람이 운명적으로 받는 벌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요양원은 치료 뿐만 아니라 계몽과 교육 목적에서도 꼭 필요하다.”고 했다.
셜우드 홀 선교사는 후원자를 모으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그는 오하이오(Ohio) 주 클리브랜드(Cleveland)에서 미국에 “크리스마스 실 운동”을 보급시킨 두 사람을 만나고 조선(한국)으로 돌아와 1932년 “크리스마스 실 위원회”를 조직하고 1932년 처음으로 거북선으로 도안하여 실을 발행하고자 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허가가 나지 않아 남대문으로 바꿔 발행되었다. 실은 매년 발행되어 아홉 차례 발행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1940년 전쟁의 와중에 서양인들의 존재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요양원을 접수하고 셜우드 홀 선교사의 가택을 수색하였다. 일본은 셜우드 홀 선교사에게 “실”에 서기연호를 삭제하고 일본연호를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 셜우드 홀 선교사는 이에 반발하여 “실” 운동의 경과 기간을 적기로 마음 먹고 “Ninth Year”라고 적었다. 이 “실”은 셜우드 홀이 조선에서 제작한 마지막 “실”이 되었다.
이 일로 조선을 사랑한 셜우드 홀 선교사 부부는 일본 헌병대에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어 벌금 5,000엔과 함께 국외추방되었다. 그 후 1941년부터 1963년까지 인도로 건너가 결핵 퇴치사역을 감당하다가 은퇴한 후 캐나다 벤쿠버로 돌아가 자선 의사로 봉사하였다. 셜우드 홀 선교사는 1991년 4월 5일 캐나다 벤쿠버에서 98세로 세상을 떠났고, 유언에 따라 그의 부모가 묻혀있는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같은 해 세상을 떠난 부인 메리안 홀(Marian Hall) 선교사 역시 그곳에 안장되었다.
양화진에 묻힌 홀(Hall) 선교사 일가는 이렇다. 조선(한국)에 파견된 선교사 중 순직한 닥터 윌리엄 제임스 홀(Dr. William James Hall) 선교사, 그의 아내인 닥터 로제타 셜우드 홀(Dr. Rosetta Sherwood Hall) 선교사, 아들인 닥터 셜우드 홀(Dr. Sherwood Hall) 선교사, 며느리 닥터 메리안 홀(Dr. Marian Hall) 선교사, 셜우드 홀의 여동생인 이디스 마거리트 홀(Edith Margaret Hall) 선교사. 어린 시절 사망한 에디스를 뺀 나머지 4명이 이 땅에서 봉사한 기간을 합치면 무려 73년이 된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것은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와 그의 아내 로제타 셜우드 홀 선교사 묘비에 적힌 성경 구절이다. 2대에 걸쳐 조선 땅을 위하여 전 생애와 목숨을 바친 그들의 숭고한 삶이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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