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ird 선교사 가족사진

배위량·안애리 선교사 부부 묘비


Annie L. Baird, 1864-1916 (Entering Korea in 1891)

나의 뱃속에는 둘째 아기가 임신되어 자라고 있었습니다. 좌절했던 나 자신을 뉘우치면서 신앙으로 승리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꺼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9)

나는 갈길 모르니 주여 인도 하소서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서 부산항은 일본군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동학 농민운동이 일어나 조선(한국)은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배위량 선교사는 조선(한국)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육 사업으로 봉사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부산은 일본인 전관 거류지였기 때문에 선교기지를 울산으로 옮기고 싶어 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의 마음은 조선(한국) 민족을 위한 애국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나는 나의 남동생 내외가 조선(한국)에 올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나의 남동생 아담스(Rev. James Edward Adams 안의와) 목사 내외는 중국 하이난(Hainan)섬에 선교사로 가기로 되어있었습니다. 배위량 선교사의 노력과 기도로 마침내 1895년 5월 29일 동생인 아담스 선교사와 올케인 넬리딕(Nellie Dick)이 3개월 된 첫 아들을 데리고 부산에 부임하였습니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였고 부산 부두는 일본 사람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듯 하였습니다. 1895년 10월 민비 시해 사건이 있었습니다. 조선(한국) 사람들이 국모(國母)가 시해를 당해도 하소연도 못하는 상태였을 때 배위량 선교사는 흰 갓을 쓰고 상복을 입었으며 애도하였습니다. 궁궐에 갇힌 임금님의 간청으로 배위량 선교사는 다른 선교사들과 교대로 자면서 왕을 지켰습니다. 선교사들은 일본편이 아니라 조선(한국)의 편이었습니다. 배위량 선교사와 나는 더 이상 부산의 일본인 전관 거류지에서 복음 전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때마침 1895년 11월로 대구선교부 승인이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 확정되어 왔습니다. 참으로 잘 된 일이라 생각하고 대구로 가려하는데 이번에는 주한 미국공사 알렌(Allen)이 반대하였습니다. 대구와 같은 내륙지방에 선교부를 설치하는 것은 조선(한국) 정부의 실정법에 위반된 것이고 또한 대구에서 문제가 생기면 미국공사 알렌 자신이 책임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대구에서는 프랑스 신부가 주민들의 습격을 받아 포박되고 수염이 뽑힌 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기도하였지만 쉽게 응답받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이때 작아진 나를 발견하였습니다. 아직 어리고 부족한 나를 깨닫고 찬송시를 지었습니다.
1. 나는 갈길 모르니 주여 인도 하소서 어디가야 좋을지 나를 인도 하소서 어디가야 좋을지 나를 인도 하소서 2. 아무것도 모르니 나를 가르치소서 어찌해야 좋을지 나를 가르치소서 어찌해야 좋을지 나를 가르치소서 3. 아기 같이 어리니 나를 도와주소서 힘도 없고 약하니 나를 도와주소서 힘도 없고 약하니 나를 도와주소서 4. 맘이 심히 슬프니 나를 위로 하소서 의지 없이 다니니 나를 위로 하소서 의지 없이 다니니 나를 위로 하소서 아멘
배위량 선교사는 민비 시해사건 때 더욱 애국심이 높아져서 상복을 입은 채로 서경조씨와 1895년 12월 대구를 향해 떠났습니다. 마펫 선교사가 평양에서 선교기지를 위한 부지를 구입했다가 실패한 것을 잘 아는 나는 대구 선교기지를 위한 부지구입이 순조롭게 되도록 기도하였습니다.
흰 상복을 입은 배위량 선교사를 대구 사람들이 잘 알아보지 못하였고 서경조씨는 약령시 일대를 돌면서 성령님의 인도하는 대로 선교기지가 될만 한 집을 찾아 다녔습니다. 마침 민비 시해사건과 동학혁명으로 헐값에 집을 내 놓은 것이 있어서 대구선교부 설립을 위한 부지를 쉽게 살 수 있었습니다. 기와집을 217달러 76 센트에 샀습니다.
당시 조선(한국) 돈으로 435원 52전이었습니다. 초가집 5채를 더 매입하여 420평의 부지를 샀습니다. 1896년 4월 배위량 선교사와 나는 1년 6개월 된 아들 존(John)과 대구로 출발하였습니다. 가마를 타고 육로로 3일 걸려 대구에 왔습니다. 대구에서 평생 선교사로 일하리라 생각하고 왔습니다. 그러나 가마가 도착하기도 전에 서양여자와 아이가 온다는 소문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가마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집에 도착하여 방에 들어갔는데 사람들이 들어와서 노크도 없이 방문을 활짝 열어보고 입에 담지 못할 무례한 말을 하였습니다. 체면도 없고 배려도 없이 들이 닥치는 구경꾼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관리들에게 신고하니 병사 2명이 와서 방망이를 휘둘러 대문 밖으로 구경꾼들을 몰아냈습니다.
대구에 도착한 첫날부터 나에게는 두려움과 공포감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밤이 되자 개짓는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신방을 구경하듯 문구멍을 뚫고 침실을 훔쳐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날씨가 더워지는 여름에는 대구읍 성안의 기온이 살인적인 더위이며 각종 냄새가 진동을 하였습니다. 나는 신경과민 증세가 생겼고 이런저런 핑계로 대구를 떠나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마침 배위량 선교사는 교육고문에 임명되어 우리는 서울로 가게 되었습니다. 1896년 4월부터 12월까지 9개월 동안 재임 기간이었지만 내가 대구에 실제로 머문 기간은 6주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부산과 대구에서의 5년 기간 동안 내내 문화충격을 이겨내지 못하였습니다.
배위량 선교사의 대구선교부 일은 나의 동생 아담스 선교사에게 인계되었습니다. 이삿짐을 가져 오려고 부산으로 갔다 오면서 사고가 났습니다. 동생 아담스는 말을 타고 진흙 다리를 건너다가 개울에 떨어져 척추를 다쳤고 배위량 선교사는 말을 타고 가다 깊은 도랑에 빠져 갈빗대 하나가 부러졌습니다. 나의 대구에 대한 인상과 느낌은 악몽과 같았습니다. 동생 내외에게 대구를 맡기고 떠나는 마음이 무거웠고 더욱 열심히 기도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동생 아담스 선교사에게 질문하여 보았습니다. 대구와 같은 곳에서 선교하는 것이 무섭지 않니? 동생 아담스 선교사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아니야 누님, 대구는 제2의 예루살렘이야! 대구 사람들은 순박하고 우리는 대구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어요.

(임원주 작가 글 따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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