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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조선, 구한말 미국 선교사 열전 43

Samuel F. (무어, 모삼열) 선교사

크리스찬타임스 | 등록일 2020년03월28일 08시11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Samuel Forman Moore. Jun. 3. 1860 - Dec. 22. 1906 (Entering Korea in 1892)

 

서울 승동교회를 창립하고 천대받고 버림받은 백정들에게 희망의 복음을 전하였던 사무엘 무어(Samuel F. Moore) 선교사 역시 맥코믹 신학교 출신이었다. 1860년 9월 15일, 일리노이주(Illinois) 그랜드 릿지(Grand Ridge)에서 출생한 무어 선교사가 몬타나(Montana) 대학을 졸업한 것은 29살 나던 1889년이었다. 곧 바로 맥코믹 신학교에 진학한 무어 선교사는 3년후인 1892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그해 4월 시카고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미 안수를 받기 전 1891년 12월 7일 선교사로 임명받은 무어 선교사는 1892년 8월 16일 은둔의 나라로 향하는 배에 올랐고, 부인 로즈(E. Rose)와 함께 고향인 미국 일리노이 주를 떠나 1892년 9월 19일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곳 조선(한국)에서 1906년 12월 22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14년간을 조선(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있어서 매우 선명하면서도 온화하고 관대한 성품으로 널리 알려진 무어 선교사는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복음 안에서 하나라는 복음 본래의 사명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변함 없이 실천했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누구도 모방할 수 없을 만큼 그의 태도는 한국의 하류층의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었고 이와 같은 성품에 기초한 그의 리더십에 힘입어 그는 이 백성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교회 가운데 몇을 세웠다. 그는 자유자나 종이나 복음 안에서 하나라는 역사의 진실을 몸으로 실천하고, 한국 사회에 신분 타파를 정착시킨 주인공이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도움으로 좋은 어학교사를 만나 한글을 배웠으며, 한글로 전도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어학에 능통하였다. 무어 선교사는 권서인 서상륜과 함께 백정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곤당골(을지로 입구, 현 롯데호텔)에 자리를 잡고 백정들을 상대로 전도를 하여 1893년 6월 16명이 모인 가운데 곤당골 교회를 설립하고 학교도 세웠다.
학생 중에 봉주리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백정인 아버지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무어 선교사는 고종의 주치의요 제중원 원장 에비슨 선교사의 진료를 받게 하여 박씨를 치료해 주었고 완쾌된 박씨는 큰 감명을 받아 곤당골 교회에 출석하고 세례를 받아 이름조차 없던 백정 박씨는 박성춘이라는 이름도 얻게 되었다. 여기에 전도에 자신을 얻었던 무어 선교사는 양반들에게도 전도하여 상민과 천민 구별 없이 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앙의 공동체를 형성해 나갔다.
 
무어 선교사의 의식화 교육을 받았던 박성춘은 무어 선교사와 협력하여 백정 선교에 힘을 쏟았다. 이 일로 곤당골 교회의 분위기가 신분 철폐 쪽으로 흘러가자 양반들의 입지가 좁아지고 양반들의 반발 또한 거세어 졌다. 양반들은 따로 나가 예배를 드리는 사태까지 벌어졌으나 “예수님 안에서는 양반과 천민의 구별이 없으며, 다 주님 안에서는 형제고 자매입니다.” 하며 저들의 행위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무어 선교사는 천민들이 모여 사는 마포 강변으로 오르내리면서, 어부 생활을 하는 그 지역에도 전도를 하였다.
예수 안에서 신분이 철폐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천민들은 계속해서 모여들었고, 무어 선교사는 마포에서 배를 타고 광나루까지 다니면서 전도한 결과 16개의 교회를 세웠다. 그 대표적인 교회가 마포구 있는 동막교회와 서대문구에 있는 대현교회이다.
 
양반들이 따로 나가 예배를 드리던 홍문삿골 예배당이 뜻하지 않은 화재로 소실되자, 양반들이 눈물로 회개하며 다 곤당골 교회로 모여들었고 이렇게 하여 양반 천민이 예수 안에서 하나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렇게 되자 교회가 점점 부흥하고 교인들이 많아지자 무어 선교사는 1905년에 인사동에 새 예배처소를 마련하게 되었는데 양반과 천민이 함께 승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면서 승동교회(勝洞敎會)라 이름을 지었다. 현재의 승동교회이다.
 
그러나 무어 선교사는 1906년 12월에 장티푸스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묘비명은 “조선인을 사랑하였고 또 그들을 예수께로 인도하기를 원하였나이다” 조선에서는 무어 선교사가 최초의 민중목회자의 창시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무어 선교사의 사상적 영향을 많이 받았던 백정들은 민중운동에 앞장선 무어 선교사의 정신을 이었다. 승동교회에 장로 선거를 할 때 백정 박성춘이 당선되자 양반들이 더 이상 천민들과 같이 다닐 수 없다 하면서 안국동에 안동교회를 설립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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