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습니다. 선교사님은 북방선교를 어떻게 시작 하셨습니까?
한국의 한양대학교에서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에 와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침례교 목사로서 20년간 캘리포니아 얼바인침례교회를 섬겼습니다. 1989년 침례교단의 주선으로 약 13명의 목사들과 함께 아버지의 고향인 평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부활절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제가 음향장치를 가지고 가서 평양에서 부활절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버지의 고향에 간다는 것은 저에겐 큰 충격이기도 했습니다. 평양에 가기 전, 금식기도 할 때 하나님이 북한을 바라보시는 대로 저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북한에서 본 우리 동포들의 모습은 마치 로봇과 같고, 훈련된 꼬리 없는 짐승과 같이 보였습니다. 이 모습은 아버지의 고향을 찾아간 기쁨의 충격보다 아픔의 충격이 훨씬 컸습니다.
이 광경을 보여주신 하나님께 항의를 했습니다. 왜 이런 끔직한 모습을 보여주시냐고. 그리고 저는 무엇을 해야하냐고. 그러나 평양을 떠날 때까지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함께 간 목사님들이 16일간 평양에 있으면서 도청이나 CCTV 등으로 인하여 긴장하여 말도 못하고, 잠을 못자는 분위기였습니다. 출발 시간이 되었을 때 모든 목사님들이 평양 공항으로 가기 바빴으나 저는 안내원에게 기차로 중국 심양으로 가게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심양에 도착하여 서탑교회의 담임목사인 고령의 오애은 목사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오애은 목사님은 중국의 문화혁명을 겪은 신실한 목사로서 모든 조선족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오 목사님과 이야기 하는 도중에 요령성, 흑룡성, 길림성에 조선족이 2백5십만 명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왜냐하면 평양에 있을 때 하나님께 한 항의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조선족을 통하여 북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생각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시작하라는 말입니까? 하는 질문에 하나님은 중국에 있는 조선족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받은 북한에 살고 있는 친척에게 초청장을 보내 중국으로 불러와 일대일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북한과 중국의 조선족을 초청하면 왕래할 수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렇게 처음 시작이 되셨군요. 그 이후의 사역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세요.
서탑교회 앞에 금강여관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 곳에서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했습니다. '내 목숨 다하는 날까지 내 동족을 복음으로 구원하겠습니다'하는 서원이었죠. 1993년도에 미국 침례교단에서 저를 중국 선교책임자로 임명하여 파송했습니다. 미국에서 목사가 왔다고 많은 조선족 교인들이 모였습니다. 신앙상태는 열정적이었으나 신학적으로는 미약 했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저는 시무하고 있던 얼바인침례교회의 집사들을 훈련시켜서 4명씩 번갈아 연길에 가서 조선족에게 성경공부를 인도하도록 했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1993년에 연길에 침례교신학교를 개설하고 1기생 50명을 모집하였는데 100명이 신청하였습니다. 보안관계로 다 받을 수 없어 50명은 본교생으로, 25명은 청강생으로 받아 2년간 교육을 시켜 2년 후인 1995년에 졸업을 시켰습니다. 그때 한 학생에게 한달에 중국화페로 400원을 지불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공부를 하면 일을 할 수 없으니 생활비를 지급해야했기 때문입니다.
매월 20,000원이란 큰 재정이 필요했습니다. 1995년도 제1기 졸업생 중에서 각 지역 29개 지역에 회장을 임명하여 총회를 결성하고, 조선 침례교단을 설립하였습니다. 지금은 한국 침례교단과 자매 관계로 피차 협력하고 있습니다. 신학교와 교단의 책임자를 세워 놓고 북한 선교를 위하여 집사람과 연길에 들어갔습니다. 그 당시는 1994년에 김일성 사망 후 '고난의 행진'이라고 많은 북한 사람들이 굶어 죽을 때였습니다. 따라서 살길을 찾아 탈북한 북한 사람들이 많았죠. 350만 명이 굶어 죽는 이 고난의 시기에 탈북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김일성을 하나님으로 믿고 살아왔던 이들에게 복음의 전달은 힘들었으나 성령의 도움으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져 갔습니다. 배고픔을 통하여 하나님은 복음의 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25년 동안 북한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독침으로 죽은 선교사도 많고, 납북되는 선교사도 있어 저 역시 두려움이 있었으나 나를 구원해주신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기 위해 순교의 각오를 가지고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많은 탈북자를 만나셨겠습니다.
탈북자 한 사람은 인민군에 있을 때는 먹는 문제가 해결되었으나 제대후부터는 굶어야 하는 형편이어서, 할 수 없이 두만강을 건너 왔습니다. 이 사람은 국경 경비대에서 13년간 근무하다가 제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은 부산 고신대학을 졸업하고, 대전 침례신학원을 졸업후 목사가 되어 지금 저와 동역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외에도 비슷한 경로로 우리와 만나 함께 동역하고 있는 동역자가 4,5명이 있습니다.
이 동역자들의 도움으로 비밀 통로를 통해 비밀한 장소에 도착하면 3박 4일을 오직 말씀으로 양육하여 머리 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예수꾼으로 만듭니다.(비밀장소는 이미 없어졌으므로 밝힙니다.) 절박한 이들에게 생전 처음 듣는 예수는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20년이란 긴 세월동안 탈북자 사역이 쉽지 않으셨을텐데요?
20년간 예수쟁이 만드는 기계로 살아왔습니다. 중국에서 오랫동안 사역할 수 있었던 것은 연길 과기대 산하 해양대학의 교수로서 비자를 받기때문에 장기적으로 사역을 할 수 있었구요. 이 때 보안에 문제가 생겨 북한 외사과에서 나를 체포하려고 해양대학교로 와서 나를 찾았으나 느낌이 이상해 심양으로 와서 비행기 편으로 아슬아슬하게 중국을 탈출하여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가 사역을 시작한지 3년이 지날 때였습니다. 미국에 들어와서 오렌지 카운티 법원에서 이름을 영어로 바꾸고 새로운 여권으로 다시 중국에 들어가서 사역을 계속했습니다.
또한 연길에서는 중국사람들을 위한 신학교육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문화혁명을 겪은 뜨거운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데 신학을 교육하여 이슬람선교 사역을 위함이였습니다.

1단계로 중화복음총회 총회장과 협의하여 세계선교를 위해 먼저 아랍선교를 위해 최고 지도자 50명을 모집할 수가 있었습니다. 50명씩 격월로 아랍선교를 위한 교육사역을 9년간 섬겼습니다. 중화복음 교단의 협력과 제가 세운 에스라 신학교와 함께 이 사역을 하였습니다.
2단계로는 세계 어디든지 살고 있는 화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다시 실크로드에 살고 있는 아랍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는 잔략을 세우는 것이였습니다. 이 사역을 뒷받침해주셨던 분은 한국 고신교단의 문종호 장로였습니다. 저는 침례교단 목사이지만 선교현장에서 만나 협력을 받았던 분은 전부 고신 교단의 장로와 목사님들이였습니다. 탈북자들을 한국 대학에 보낼때도 고신대학에 보냈고, 선교의 후원과 협력도 고신 목사님들이 협력하였습니다. 재정적으로나 사역적으로 피차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에스라 신학교의 졸업식에서 축사를 한 문종호 장로님은 축사 후 뇌졸증으로 쓰러지셔서 든든한 후원자를 잃은 사역은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사역은 탈북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더 많은 재정이 소요되었습니다. 문 장로님의 쓰러지심으로 다시 본래의 사역인 북방사역에 전념하게 되었지요.
저는 주님의 은혜와 섭리로 20년간 북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나팔수로 사역하다가 2015년에 한국으로 나왔습니다. 2016년 김정은이 노동당 대회를 열고 그 전에 모든 인민은 북한으로 들어오라는 명령을 받게 되어 저의 동역자들 모두가 북한에서 나오지 못하고 연락이 두절되어 더 이상 사역을 할 수가 없어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죠.
돌아와서 북방선교 전략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1) 북한이 보인다. 2) 통일이 보인다. 3) 대박이 보인다. 대박은 정치적인 통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입니다.
그 동안 여러차례에 걸쳐 통일의 기회가 있었으나 하나님이 통일을 허락하시지 않는 것은 한국교회의 책임이라고 믿습니다. 한국교회가 교회 안에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금권, 명예, 성장 등을 하나님 보다 더 귀하게 여깁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회개하여야 합니다. 옷을 찢지말고 가슴을 찢는 회개가 요구됩니다. 교회가 그리고 먼저 믿는 우리가 겸손히 회개하면 하나님이 복음의 통일도 허락하실 것이고 우리를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한국에서의 사역과 앞으로 무엇을 하실 계획이신가요?
한국에서도 탈북자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대형교회 치고 탈북자 선교를 하지 않는 교회는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탈북자를 거느리고 있느냐를 자랑하고 있습니다만 그들의 영혼 구원에 대하여는 관심이나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북한선교가 아니고, 돈 자랑입니다. 어쩌면 긍휼사역일 수는 있습니다. 저는 2년 반 전에 효창복지관을 빌려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효창복지관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복지관에서는 종교활동을 못하므로 탈북민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사역을 합니다. 여기서 저는 중국에서 탈북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방법대로 합니다. 먼저 이들이 복음에 문을 열고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등을 부르고 구원의 확신을 얻기까지 중국에서 3박 4일을 함께 하였던 방법대로 서울에서 탈북자 선교를 똑같이 하였습니다. 이들이 효창 탈북민 공동체로 오는데 차비와 이곳에 참석함으로 일하지 못하는 비용을 지불해야 올 수가 있습니다. 저는 한명당 10만원을 줍니다. 물론 마치기 전에 간증을 쓰게 합니다. 누구소개로 왔는가? 대개는 복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의 소개였습니다. 그 다음 예수 믿기 전의 삶은 어떠하였는가? 마지막으로 은혜 받은 후 어떻게 살겠는가?를 쓰게 합니다. 이렇게 해서 170주 사역기간에 1108명이 복음으로 구원 받았습니다. 한 사람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생각하시는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지난 1월에는 우리 선교회에 직분자를 세웠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북방선교회를 떠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직분자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몇 주일 나오지 않아서 알아보았더니 어떤 대형교회에 나가고 있었습니다. 한달에 20만원 준다고 하는 교회에 나간다고 하더군요. 마음이 아팠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탈북자들의 영혼 구원에 나의 삶을 드리기로 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예수님을 전하며 살겠습니다.

복음으로 통일될 때까지 주님이 동행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대담·정리 이윤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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