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liam M. Junkins, 1865-1908 (Entering Korea in 1892)

“6마일 이상을 넘어가지 마시오! 전킨 선교사!” 복음을 전하다 과로로 병에 걸린 전킨 선교사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미국 남장로회 호남선교부는 윌리엄 전킨 선교사(Junkin, William McCleary, 1865~1908)에게 미국으로 건너와 요양할 것을 권했지만 미국으로 가면 더 이상, 조선(한국)으로 올 수 없다는 것을 안 그는 사양했다.
군산 구암에 선교부를 설치하고 금강, 동진강, 만경강 일대를 복음선을 타고, 말을 타며 복음을 전한 전킨 선교사가 그 명령을 지킬리 만무했다. 오히려 전주 일대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고, 전주서문교회를 서문 밖으로 이전 건축하였다. 그때 당시 전주 서문 앞거리에는 일본인들의 가옥이 하나 둘 들어서고 있었고, 이것이 전주지역 조선(한국)인들에게 위화감을 주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전킨은 교회를 세운 것이다.


일본인에게 나라를 빼앗긴 조선(한국)인들에게 있어 이것은 새로운 나라였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을 고백하며 찬양했을 조선(한국)인들…. 그들의 찬양과 기도가 서문의 일본가옥들 거주지역에 전파되었을 때 그들은 이미 독립된 나라를 가졌던 것이다.
미국 버지니아(Virginia) 주 크리스천벅(Christianbuck)에서 태어난 그는 버지니아 유니온 신학교에서 수학했다. 전킨 선교사는 재학 중에 밴더빌트 대학교(Vanderbilt University)에서 개최된 신학교 선교대회에 참석했는데, 그때 언더우드 선교사와 윤치호 선교사의 강연을 듣고 조선(한국)선교를 결심하게 된다. 그는 남장로교회 선교부가 파송한 '7인의 선발대' 중 한 사람으로 내한했다. 전킨 선교사는 의료선교사 드루(A. D. Drew)와 함께 전라도 사역의 첫 열매를 거두었다. 선교부는 김제, 익산, 옥구 등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한 전킨 선교사의 과로를 고려하여 전주로 임지를 옮겨주었지만, 그는 그곳에서 급성폐렴에 걸리고 말았다. 조선(한국)에 대 부흥이 일어난 시기. 1908년 1월 2일 그는 영원한 나라로 갔다.

전킨 선교사는 전북 군산 구암동산의 선교베이스(1899년)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다. 군산 선창지역에서 구암동산으로 선교부를 정한 것은 '복음선'을 정박하기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전킨 선교사는 조선(한국) 선교 역사상 처음으로 '복음선'을 마련하여 복음을 전한 선교사이다. 그의 복음선은 한국지형에 알맞은 황포 돛배였다. 그는 조선(한국)이라는 땅 끝으로 와 섬으로, 오지로 들어간 것이다. 금강을 따라 부여, 서천, 보령, 장항까지 복음을 전했고, 만경강, 동진강을 따라 옥구, 익산, 김제, 부안까지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고군산도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했다. 고군산도는 무녀도, 신지도, 선유도, 대장도, 관리도 등으로 이루어진 무리 섬(군도)이다. 전킨 선교사가 세운 교회는 만경강과 동진강 주변에 있는데, 배를 타고 가서 다시 말을 타고 복음을 전했다. 군산에서는 군산교회, 구암교회, 개복동교회, 만경강 중심으로 만자산교회(옥구 지경리), 남차문교회(익산남전), 송지동교회(김제), 동진강 중심으로 봉월교회(김제)가 있다. 봉월교회를 통해 대창교회(김제)가 설립되었으며, 대창교회의 최학삼 장로는 선유도의 선유교회를 세웠다. 전킨 선교사는 대창교회의 임시당회장이 되어 1907년 최학삼을 장로로 선출한다. 전킨이 뿌린 섬선교의 씨앗은 최학삼 장로를 통해 고군산도의 선유도에 선유교회로 피우게 하였다.
전킨 선교사의 장례를 치룬 후 그의 아내 레이번(Mary Leyburn 1865~1952)은 자녀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가 전킨 선교사의 모교회에 들러 그의 선교사역과 죽음에 대하여 들려주었다. 이에 교회는 감동을 받고 전킨 선교사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는지 물었다.

“서문교회 예배당 건축이 완공되었으나 종탑이 완공되지 않았으니 종을 만들어주세요.”
그러자 미국교회는 종을 만들었으며, 그 소식을 접한 전주서문교인들은 모금하여 종탑을 만든다. 종은 태평양을 건너 일본 나가사키와 부산, 제물포를 거쳐 군산으로 들어왔고 만경강을 통해 전주까지 들어왔다. 종이 들어오던 날 만경강지역의 송지동 교인들과 그 일대 교인들이 우마차에 이 종을 싣고 전주서문교회로 운반했다. 종이 들어올 때 전킨 선교사를 사랑했던 수많은 교우들은 그 종을 마치 전킨 선교사인 것처럼 맞았다. 종이 들어온 길, 바로 그 길로 전킨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왔으며, 복음을 전했다.
1908년 12월 전킨의 종이 서문교회 예배당에 달리고 아침과 저녁, 종이 울릴 때 그 종소리를 듣는 전주 시민들은 머리 숙여 전킨 선교사의 사랑과 복음 앞에 감격하였다. 전킨은 종으로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을 공격한 후 이 전킨 선교사의 종을 무기 재료로 쓰기위해 공출해 갔다(1944년). 지금의 서문교회에 있는 종은 해방 후 대구에서 제작되어 매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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