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일 예배 설교(2020. 6. 14 ) - 김요셉 원천침례교회(수원) 목사 - "내게 배우라"
(마태복음 11장 25-30절)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 오늘 본문은 "그 때에"(25절a)로 시작한다. 그때가 어떤 때를 지칭하는 것인지 살펴보는 것이 평소 잘 알고 있는 오늘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마 11:1)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 예수님은 10장에서 자신과 함께 복음을 전도할 열두 제자들을 부르고 권능을 주시며 세상 박해에 대해 교훈하시고 전도 실습을 하도록 파송하신 직후, 11장에 들어와 예수님도 스스로 전도 사역에 나서신다(1절).
- 전도하러 나선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기도에 언급되는 어린 아이들 곧 순수하게 예수님을 신뢰하는 제자들(25-30절)을 접하기 전에 두 그룹의 무리를 만나신다.
- 첫 번째는 침례 요한의 제자들이며(2-15절), 두 번째는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이다(16-24절). 그런데 전도에 나선 예수님이 두 번째 그룹으로부터 거부당하는 체험을 하신다(20절).
- 예수님이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세 고을(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에서 회개가 일어나지 않았다. 예수님이 전도 실패를 경험하신 것이다.
- 이제 예수님이 만나신 두 그룹(침례 요한의 제자들, 회개하지 않은 세 고을)에게 하신 말씀과 예수님을 신뢰하는 제자들에게 하신 초대의 말씀을 통해 오늘 우리가 되새겨야 할 교훈을 함께 보기로 하겠다.
1. 실망 때문에 회의가 생긴 침례 요한
(마 11:2-3) "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 침례 요한은 오실 메시아를 예비하는 선봉대장 역할을 한 선지자적 인물이다. 그는 자기 시대 사람들이 종교적으로 살면서도 실제로는 죄 속에서 살아가고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을 질책하며 회개를 외쳤고, 실제로 강력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체험한 영적 인물이다. 그러면서 요한은 큰 기대를 걸었다.
- 그런데 옥에 갇혀 있는 침례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질문한다. 그는 요단강에서 예수님께 침례를 베풀고, 많은 사람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오셨다고 선포했다. 그렇게 했던 그가 예수님께 "당신이 오실 메시아가 맞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메시아로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묻는다.
- 오실 메시아를 예비하는 역할을 감당한 선지자 침례 요한조차도 예수님을 향한 실망 때문에 반문이 생기고 회의가 일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그런데 침례 요한이 왜 예수님을 향한 반문과 회의를 가졌을까 조금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요한이 "당신이 오실 메시아가 맞습니까?" 하는 질문을 갖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 침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예수님의 길을 준비한 예언자다(마 3:1-3). 그는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자신이 침례를 베풀고 있는 요단강으로 몰려오자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 3:7) 하면서 그들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사람이다. 요한은 메시아가 오면 자기보다 더 강력한 영성을 가지고 더 강력한 혁명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 침례 요한의 메시아를 향한 기대는 매우 컸다. 자신의 성향대로 예수님은 더욱 더 강력한 권능을 발휘하시면서 종교 개혁과 정치 사회적 정화 운동을 강력하게 펼치실 줄 알았다. 예수님은 요한의 기대와 달리 오히려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따뜻한 목자의 모습으로 양떼를 돌보고 계셨다. 자신은 옥고를 치르고 있는데, 침례 당시에 체험했던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 그러니 침례 요한의 실망은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런 요한의 실망하고 반문을 제기하는 모습에도 예수님이 싸잡아 비난하지 않으시고 이해해 주신다. 뿐만 아니라 큰 격려의 말씀으로 위로해 주신다.
- 침례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다음에 예수님이 요한에 대해 말씀하신다(7-11절).
-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 의심하는 침례 요한을 야단치지 않고 오히려 칭찬하신다. 사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지금도 하나님 앞에서 감사 기도를 드리신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와 같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크심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11절a) 침례 요한이 왜 여자가 낳은 사람 중에 가장 큰 사람일까? 구약의 위대한 인물 아브라함, 다윗, 솔로몬보다,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 이사야, 예레미야보다 요한이 더 큰 사람이라고 칭찬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요한이 메시아 예수님이 오심을 예비하는 축복의 자리에 있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도, 다윗도, 이사야도 예레미야도 그분이 오시길 기다리면서 그렇게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다. 하지만 침례 요한은 그분이 오심을 체험하고 그분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사람 중에 요한보다 큰 사람이 없다고 하신다.
- 그런데 그 말씀에 토를 달아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11절b)고 하신다. 예수님이 오늘 여러분과 저를 보고 하시는 말씀이다. 침례 요한보다 우리가 더 크다는 말씀이다. 그는 헤롯 안디바에 의해 목 베어 죽게 된다(막 6:14-29).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지 못한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명확하게 알고 있으며, 그것을 경험을 하지 못한 침례 요한보다 그분을 더 정확하게 전하고 소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이 된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소개할 수 있기 때문이란 말이다.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을 전할 수 있고 나타낼 수 있는,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이 여기에 앉아 있다는 것이다.
-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 살아가려는 우리에게 때로는 우리가 기대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지 못할 때 실족하고 실망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리고 신앙의 회의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체만으로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격려하신다. 침례 요한에 견주어 우리를 더 큰 자로 여겨 주신다. 침례 요한도 체험하지 않은 부활하신 예수님, 십자가 복음의 중심 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셨기 때문이다.
2. 실종된 반응으로 회개하지 않는 고을 주민들
- 예수님은 이어지는 16-19절, 20-24절을 통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세 고을에 대해 질책하신다.
- 먼저 예수님은 장터에서 동무를 불러 놀자고 초청하는 아이들의 비유를 들어 침례 요한과 자신의 모습을 그려 주신다.
(마 11:16-17)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마 11:18-19a) "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 무반응의 문제가 반문의 문제보다 훨씬 더 큰 문제다. 예수님은 침례 요한의 회개를 향한 사역, 당신의 회복을 향한 사역에도 반응하지 않는 무감각한 영적인 삶을 지적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장 많은 권능을 베푸셨던 세 고을, 곧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을 향한 엄한 경고의 말씀을 주신다(마 11:20-24).
- 한국 교회는 어느덧 외국의 선교지가 아니라 복음의 풍성함이 넘치는 축복의 나라가 되었다. 예수님이 지금 여기에 오신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평소보다 많이 감동을 받고 은혜를 느끼겠지만, 이 예배소를 나가면 평소와 똑같이 무덤덤하게 살아가는 존재가 여러분과 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어떠한 자극을 주어도 영적으로 아무런 반응을 하고 있지 않는 한국 교회의 모습이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 모습이 아닌가 생각한다. 관습적으로 교회를 다니긴 해도 정작 삶의 변화는 하나도 없고 영적으로 아무런 뜨거움도 없다.
- 저는 오늘 성령님이 우리 삶에서 영적인 의사가 되어 반사 망치를 가지고 말씀을 통해 우리 무릎을 툭툭 치고 계신다고 믿는다. 오늘 본문에서 성령님의 반사 망치에 반응하는 그룹이 있다. 예수님의 초대하심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금부터 함께 보기로 하자.
3. 신뢰 때문에 쉼을 얻는 제자들
- 예수님은 당신을 신뢰하고 따르는 제자들을 쉼으로 초대하신다.
(마 11:28-30)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 순종하는 제자라 할지라도 그 영혼과 삶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으로 지쳐 있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쉼이 필요하긴 한데, 예수님의 말씀은 참 역설적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쉬라고 하시면서 멍에를 메라 하신다.
- 어린 아이 같이 모든 것이 부족하고 가진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으며 조명 받을 만큼 신앙 경륜도 없고 가진 은사도 없고 지식도 부족한데도, 예수님의 말씀에 액면 그대로 바보처럼 순종하는 어린 아이 같은 신뢰를 통해서 영혼의 쉼을 얻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 제 사역과 삶에서 하나님이 어린 아이처럼 제 모습을 만져 주시는 것을 종종 보았다. 부부 관계의 어려움, 사역의 실패, 죄성의 들춰짐 속에서 하나님은 저 혼자 바둥거리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보여 주시고 저를 예수님 앞에 나가도록 해 주셨다. 예수님께 제 인생을 맡기려고 나가니까, 예수님이 저를 만져 주시고 치유해 주시면서 제게 멍에를 채워 주셨다. 예수님이 채워 주신 멍에는 저희 부부가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는 멍에였다. 예수님의 제자 훈련의 하나가 일주일에 하루는 온전하게 모든 것을 내려놓는 일이었다.
- 쉼은 예수님과 함께 묶이는 멍에로 얻어진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얼마나 역설적인 말씀인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
- 우리 교회는 다음 주부터 '멍에 메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말씀을 온전히 지키는 제자의 삶, 그냥 바보처럼 마태복음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는 것이다. 진짜 바보처럼 '제자 훈련'을 하는 것이다.
- '제자 훈련'의 멍에로 묶일 때, 우리 영혼과 삶에는 예수님만 통해 얻게 되는 안식과 쉼 그리고 회복이 생긴다. 진짜 바보처럼 '제자 훈련'을 체험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길 기도한다.
(요약/정리: 안재환 수원 원천침례교회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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