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께서는 처음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셨는지 신앙 이야기를 부탁 드리겠습니다.
저는 “복음에 빚진 자” 입니다. 오늘 이렇게 인터뷰를 통해 예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허락 해 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 드립니다.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이 제게는 큰 은혜였습니다. 수원 역전에서 구두닦이였던 제가, 교회 종치기를 하며 공부하던 제가,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났더니 하나님께서 저를 이렇게 높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갚을 길 없는 하나님의 은혜” 입니다. 하나님을 증거할 용기를 구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언제고 큰 일을 감당하기 위해 시련을 통해 단련시키시고 저희를 꼭 부르신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교회의 문을 처음 두드리게 된 것은 매일 새벽 4시에 들려오는 교회 종소리에 이끌려서입니다. 당시 저는 수원 역전 대합실에서 기거하며 구두닦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매일 종소리가 나는 곳을 무심코 바라보았는데, 수원 농산물검사소 건물에서 작은 불빛이 보였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보니 교회 십자가 불빛 이였습니다. 마침 예배시간이었는지 10명 정도 되는 분들이 모여 기도와 찬송을 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목사님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당황한 나머지 저는 “그냥 지나가다가 들렸을 뿐입니다.” 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 때 제게 건넸던 목사님의 말씀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하하하, 네, 잘 압니다. 그냥 왔다고 생각하겠지만 다 주님의 뜻이 있어서 오신 겁니다.” 그 분이 수원역 앞 농산물검사소 2층에서 '매산감리교회'를 개척하신 김연호 목사님이십니다. 그 날 이후로 교회를 계속해서 다니며 '나는 혼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며 도와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이제한으로 비록 원하던 철도고등학교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당당한 마음으로 저는 당시 입학이 가능한 고등학교를 찾아 수원삼일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숙소는 여전히 역전 대합실이었습니다. 평일에는 열심히 고등학교를 다녔고 매주 주일이면 예배에 참석하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했습니다. 교회를 다니며 누군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행복했습니다. 몇 달 후, 후임 목사님으로 오신 최요한 목사님께서 새벽기도를 마치고 돌아서는 저를 부르셨습니다. 제가 역전 대합실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저를 교회 종각으로 안내하시며 제게 “오늘부터 이곳에서 생활하렴. 새벽 4시에 교회 종만 쳐 주면 되니깐 역전 대합실보다는 여기가 더 나을 거야.” 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부자리와 책상까지 마련해 주셨습니다. 교회 종각에 있는 반달모양의 작은 공간이었지만, 제게는 처음 가져보는 소중한 저만의 공간이었습니다.
매일 울리는 새벽종소리에 이끌려 찾았던 교회에서 제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누군가를 위해 종을 치는 소년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저 새벽기도를 드리고 싶어서 교회를 찾았을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목사님을 통해 제게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목사님의 삶을 통해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은혜' 를 느낄 수 있었다고 생각 됩니다.
제 삶을 되돌아보면 하나님께서는 항상 함께 하셨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힘든 시절의 작은 인연을 통해서도 귀한 은혜를 허락하시는 분이십니다. 제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제게 인생의 은인을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은인들 덕분에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고 대학교에도 진학 할 수 있었습니다.
제 삶 속에서 수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었고, 많은 은인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제 인생을 통틀어 가장 큰 파장을 불러 일으킨 분이 김장환 목사님이십니다. 1960년 어느 날이었습니다. 수원 영동파출소 앞에서 중학교 시절 같은 교회를 다니며 알게 된 체육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 함께 계셨던 명료한 목소리를 가진 목사님이 바로 제 삶의 멘토이자 지금까지도 제게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계시는 김장환 목사님이셨습니다. 체육 선생님으로부터 제가 독실한 크리스천 이라고 소개 받은 김장환 목사님은 제게 “신앙심이 두터운 친구인가 보네요. 문화원에서 우리 학생들 모임이 있는데, 간증을 하면 어떻겠소?” 라고 제안하셨습니다. 문화원의 모임은 십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선교하는 김장환 목사님이 대표로 있는 YFC(Youth For Christ) 모임 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간증이라고 하면 그냥 사람들 앞에 나가서 제 이야기를 하면 되는 줄만 알았습니다. 웅변대회에서도 입상한 경험이 있던 저는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떨리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감에 가득 차서 그 동안 살아왔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처음 하는 것치고는 이 정도면 잘 했지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간증이 끝난 후 김장환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아마도 제가 예수님을 깊게 만나게 된 계기가 아닌 가 싶습니다. “이 친구의 간증 안에는 크리스천이라는 증거가 없군요.”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기도도 열심히 해왔던 제게 크리스천이라는 증거가 없다고 하시니, 창피하기도 했지만, '크리스천이라는 증거' 가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렇게 저는 그 답을 찾기 위해 김장환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수원중앙침례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 예배 때 저는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해답을 찾게 되었습니다. “성경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예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겠다고 고백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을 마음으로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되고, 진정한 크리스천이 됩니다!” 저는 그 순간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고 마음으로 영접했습니다. 드디어 저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날이었습니다. 가슴 가득 벅차 오르는 감격으로 그날 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모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윌리엄 S. 박스테일 Jr. 대령과의 인연을 통해서도 보여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하나님의 섭리를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한 저는 복학을 앞두고 있었지만, 여전히 힘든 가정형편으로 인해 학업을 이어가는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산비행장에서 노무자를 뽑는다는 구인광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오산비행장에 취직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저는 김장환 목사님을 찾아 뵈었습니다. 그 당시 김장환 목사님은 오산비행장에서 근무하는 미군들에게도 설교를 하기 위해 오산비행장에 출입하곤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김장환 목사님을 통해 오산기지 부사령관인 윌리엄 S. 박스테일 Jr.대령을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대학교 복학을 위해 노무자 일자리를 구하고 싶다고 말씀 드렸지만, 윌리엄 S. 박스테일 Jr. 대령은 오히려 학교가 서울인데 너무 멀어서 다닐 수 있겠냐며 반문했습니다. 그렇게 일자리 이야기는 끝이 났지만, 그 날의 인연이 훗날 저를 미국 유학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시고 위대한 하나님의 섭리인 것을 그 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 날 윌리엄 S. 박스테일 Jr. 대령은 아내에게 선물할 그림을 그리기 위해 Orchid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저는 수원에 있는 꽃집에 가서 난초 한 아름을 사서 대령을 만나기 위해 다시 오산 비행장으로 향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대령에게 난초 한 아름을 건넸습니다. 대령은 껄껄 웃으며 “내 생각을 해줘서 고맙네. 하지만, 이 꽃은 아니네. 아마도 한국에서는 구하기 어려울 걸세.”라고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Orchid이라는 단어를 영어사전에서 찾아보고 '난초'인줄만 알았던 저는 서양란이 아닌 난초 한 아름을 건넸으니 말입니다. 허탈한 마음으로 수원으로 돌아왔지만 저는 포기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원에 있는 서울 농과대학의 식물원을 찾아 갔습니다. 연구원에게 사정을 말씀 드리고 비록 생화를 구할 수는 없었지만, Orchid이 그려져 있는 식물도감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 길로 곧장 식물도감을 들고 오산 비행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윌리엄 S. 박스테일 Jr. 대령은 너무 기뻐하며 그 자리에서 미완성이던 그림을 그려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대령은 몇 번이나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노무자 자리 취직에 대한 언급은 없었습니다. 실망스러웠지만 저는 대령께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왔습니다. 그날 밤 자꾸만 밀려드는 생각들에 시달렸습니다.


하루빨리 좋은 곳에 취직해 부모님과 가족들을 돌보고 학교도 다녀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때 체면불구하고 한 번 더 취직을 부탁드려볼 걸 그랬나 하는 아쉬움도 남았습니다. 그렇게 여러 날 심란한 마음으로 지내는데, 윌리엄 대령이 한국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실망과 함께 허탈한 마음이 밀려왔습니다. 저는 막막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주님께 마음껏 토로했습니다. 그리고 더욱 주님께 깊숙이 들어가 주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주님 저를 고아와 같이 두지 마옵소서. 도와 주옵소서.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 그 때 문득 얼마 전 김장환 목사님의 사모님 되시는 트루디 사모님께서 영어로 알려주신 성경말씀이 제 마음을 울렸습니다. 잠언 3장 5절과 6절 말씀이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순간 마음을 무겁게 하던 어둠이 사라지고 찬송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아는 지인의 소개로 수원에서 버스회사를 운영하는 분의 집에 가정교사를 시작하게 되었고 외국어대학교에 복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6개월이 흘렀고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제 앞으로 국제우편 한 통이 와 있었습니다. 편지를 보내온 분은 미국에서 남편을 잃고 혼자 사는 Anna Ihrig라는 할머니셨는데, 그 분은 제가 “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제 학비와 생활비 일체를 후원해 주겠다”고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사연인즉, 그 교회는 윌리엄 S. 박스테일 Jr. 대령이 다녔던 교회로 한국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간 윌리엄 대령이 한국에서의 일을 간증하면서 제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 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너무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자신을 나의 후견인이 되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편지 말미에 “더는 걱정 없이 공부에만 매진하고, 훗날 반드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라는 구절을 읽는데 마치 하나님께서 제게 해주시는 말씀 같았습니다. 윌리엄 대령과의 인연은 6개월 전에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순전히 제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듯 제가 상상도 못한 크기의 축복을 이미 그때부터 예비해 두셨던 것입니다. 윌리엄 대령과의 인연에서 저는 노무자 일자리를 소망했는데, 하나님께서 숨겨 두신 카드는 따로 계획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저는 Anna Ihrig 할머니의 도움으로 대학을 끝까지 다닐 수 있었고 영어 교사자격증까지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할 때쯤 후원자 Anna Ihrig 할머니에게서 뜻밖의 편지를 또 받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와서 공부를 해 보지 않겠느냐는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의 순간들이었습니다. 그 편지를 받고 저는 많은 날을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김장환 목사님을 찾아 갔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찾아가 조언을 들을 수 있는 지혜로운 분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또 하나의 축복이었습니다. 그 후 김장환 목사님은 미국에 출장 가셨을 때 윈터파크에 들려 직접 Anna Ihrig 할머니를 만나 뵙고, 유학에 필요한 일체의 사항들을 알아봐 주시고 손수 유학 준비까지 도와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믿게 된 후로부터 제 인생에 대한 의심과 비관적인 생각들은 사라지게 되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천사 같은 은인 분들 덕분에 제 인생에 좋은 날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가장 적당할 때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그 사람들을 통해 일하심을 저는 제 삶을 통해 체험했습니다.

미국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회계사로 일하시다가 신학 공부를 하시고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신 이야기를 부탁 드립니다.
후견인 Anna Ihrig 할머니와 대를 이어 후견인으로 도와주신 아들 부부 Rodney와 Romayne 덕분으로 저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 있는 밥존스 대학교에서 공부 할 수 있었습니다. 비즈니스 과목을 공부했는데, 처음에는 수업을 듣는 것 조차 힘들었습니다. 한국에서 영어를 배웠다고는 하지만 영어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영어보다는 숫자가 중요했던 과목인 회계학은 그런대로 성적이 좋았습니다. 다른 과목보다 성적이 좋은 회계학에 관심을 갖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계산은 제가 유일하게 이길 수 있는 부분이었고, 그 자부심 때문에 회계학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졸업을 하고 저는 미국 친구와 함께 회계 관리를 해주는 'Equitable Economic'라는 회사를 차리게 되었습니다. 회계 업무도 소문이 좋게 나서 관리회사도 점점 많아지고 생활 형편도 차츰 안정되었습니다. 졸업과 함께 결혼식을 올린 저희 부부는 바쁜 생활 중에도 꾸준히 성경공부를 하고, 매일 함께 경건의 시간(QT)을 가지며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날도 아내와 함께 QT를 하며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열왕기하 7장 3절~10절 말씀으로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시는 4명의 나병환자 이야기이었습니다. 내용인즉, 4명의 배고픈 나병환자들이 아람군대가 진을 치고 있던 캠프에 들어가 일단 배불리 먹고, 다른 캠프에 가서 금, 은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고 챙기며 자신들의 욕망을 채웠습니다. 그렇게 나병환자들은 배를 채우고, 재물을 챙겼습니다. 이제 더는 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문득 지나온 날을 돌아보게 되는데, 성 밖에서 굶어 죽기 전과 지금의 탐욕스런 모습이 비교되면서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그 구절을 읽는데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그 나병환자들이 마치 제 자신 처럼 생각되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미국에 왔는가?” 형편상 제때 중학교 진학도 못 했던 제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미국 유학까지 마쳤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안주하며 작지만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제 모습이 나병환자들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명의 나병환자 이야기에서 그 당시 제 모습을 발견한 저는 열왕기하 7장 9절 말씀에 집중했습니다. “나병환자들이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 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이 말씀은 점차 제 마음을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미국에 보내신 건 제가 이렇게 여유롭게 살게 하기만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할 준비를 갖추기 위해서 보내셨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저를 사역자로 부르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동안 복음을 전하는 일을 소극적으로 했다면, 이제는 복음과 선교가 오히려 주가 되는 인생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 날 저는 용기를 내어 아내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여보, 당신이 힘들겠지만 신학을 공부해야겠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소.” 아내는 신학교에 가야겠다는 제 말에 오히려 감사하다고 하며 앞으로의 진로도 무조건 제 뜻에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아직도 그 날 제게 힘을 실어 주었던 아내의 대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여보, 당신이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믿고 따를게요.” 이 자리를 빌어 사랑하는 제 아내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아내의 말에 힘을 얻은 저는 그 길로 회사를 정리하고 신학교에 갈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랜드래피츠침례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신학 공부를 마치시고 한국으로 돌아오셔서 극동방송 부사장을 역임하시게 된 이야기를 부탁 드리겠습니다.
그랜드래피츠신학교에서의 생활은 신학에 대한 폭 넓은 배움과 풍성한 만남의 축복을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신학교를 다니며 저는 채플린으로서 교도소 재소자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 할 수 있었고, 교회에서 설교를 하며 개척 교회를 시작하는 초석을 다질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랜드래피츠신학교를 졸업하고 랜싱으로 이사했습니다. 개척교회 목회자의 생활이 쉽지는 않았지만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아이들을 잘 키우고 사모로서도 열심히 내조를 아끼지 않았던 헌신적인 아내 덕분에 저는 목회에 전념 할 수 있었습니다. 랜싱에서의 목회는 즐겁고 감사한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항상 북한 선교를 위한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열왕기하 7장 3절~10절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가졌던 북한 선교를 향한 사명감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북한 선교를 향한 제 목마름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셨기에 꿈에 그리던 북한 선교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순간이 제게 찾아왔습니다.


1977년 10월. 디트로이트 신문에 선교대회가 있다는 광고가 실린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선교대회 강사가 김장환 목사님이었습니다. 저는 기쁘고 너무 반가운 마음에 선교대회 장소인 매리먼트(Marymond)침례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 때 마침 김장환 목사님의 설교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김장환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저는 꿈에 그리던 북한 설교의 해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 날의 설교 내용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오늘날 러시아에 우리가 선교사를 보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철의 장막 때문입니다. 중국에도 안 됩니다. 죽의 장막 때문입니다. 북한 땅에도 선교사를 보낼 수 없습니다. 휴전선 때문입니다. 하지만 극동방송 전파를 통해 선교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주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휴전선만 없으면 북한에 선교를 가겠다고 생각했던 저에게 강력한 울림이 왔습니다. 전파를 통하면 지금도 북한에 선교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그제야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 날 밤에 바로 김장환 목사님 숙소로 찾아갔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김장환 목사님께 제 생각을 전했습니다. “오늘 목사님 설교를 듣고 지금 이 순간에도 방송을 통해 북한 선교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북한 선교를 위해 제가 작은 역할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제가 지금 한국에 가도 보탬이 될 만한 일이 있겠습니까?” 김목사님께서는 밝은 미소를 지으시고 “그렇지 않아도 여기 오기 전에 자네 생각을 하면서 기도했지. 그냥 극동방송으로 오면 되네.” 라며 흔쾌히 저를 맞아 주셨습니다. 이렇게 북한 선교를 향한 저의 발걸음은 북방선교의 전초기지, 극동방송을 통해 시작되었습니다.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한국독립교회선교단체연합회(KAICAM) 회장으로 섬기고 계십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어와나(AWANA)를 한국에 소개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개를 부탁 드리겠습니다.
AWANA라는 단어는 디모데후서 2장 15절에 나오는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의 영어표현 Approved Workmen Are Not Ashamed 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말로서, 더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도록 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1941년 시카고의 North Side Gospel Center에서 레이덤 목사님과 아트 로하임 박사님에 의해 시작 되었습니다. 1980년대 초, 존 맥아더 교회에서 열린 어와나(AWANA) 행사에서 저는 로하임 박사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인연으로 인해 1983년 한국에서 어와나(AWANA) 코리아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국내 250여개 교회에서 5000여 명의 교사들이 20,000여 명의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훈련하는 사역으로 이 프로그램이 성공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국독립교회 및 선교단체 연합회(KAICAM)는 4,500여 개의 독립 교회와 500여 개의 선교단체로 구성된 곳입니다. KAICAM은 정치 세력화를 지양하고 '오직 예수님께만 집중하여 나의 주로 섬기겠다.'고 다짐한 공동체 입니다.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교대학원은 신학교육을 통해 해외 선교사를 양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해외 여러 나라에 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기 위해 설립된 신학교 입니다.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교대학원은 미국 시카고 디어필드에 있는 신학교육으로 저명한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교와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횃불트리니티 신학대학원대학교​


좋아하시는 성경구절과 해외에 거주하시는 크리스천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 부탁 드립니다.
제가 어려움에 직면하고 두려움으로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제게 힘이 되어주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잠언 3장 5절과 6절 말씀 입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되었는데 이 성경 말씀은 제가 힘든 학창시절을 보냈을 당시 김장환 목사님의 사모님 되시는 트루디 사모님을 통해 영어로 배우게 된 성경 말씀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우리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믿는 이에게 반드시 큰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사실을 믿고, 지금의 상황이 아닌 그 너머에 일하고 계신 주님께 항상 감사하며 노력한다면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주님, 그리고 우리에게 큰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선하심을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절벽 앞에 서 있을 때 사다리를 만들어 주시고 계속 걷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 안에서는 이 세상 어떤 경험도 헛된 것이 없음을, 모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준비시키기 위한 훈련임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노승빈 (크리스찬타임스 한국후원회 회장, 백석대 교수)·정리 엄상윤 (크리스찬타임스 한국후원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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