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승혁


지난 6월 29일,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발의된 후 각계에선 법안에 대한 지원 사격이 한창이다. 30일에 국가인권위원회가 '평등법' 제정을 촉구하는 의견을 표명한 것을 시작으로, 각 시도의회에서는 촉구안이 상정되고 있고, 심지어 지하철 노동조합에서도 지하철 곳곳에 차별금지법 지지를 호소하는 포스터를 부착하는 일들까지 일어나고 있다.

문제의 시급성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가 그 시급함을 깨닫고 교단과 주요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결사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러한 교계의 힘있는 목소리는 차별금지법을 막기 위해 필수적이며 지속적이어야 할 것이 분명하다.

이와 함께 우리가 지혜롭게 대처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교계의 이러한 반응을 무마하려고 수면 아래에서 진행하고 있는 저들의 프레임 전략이다. 바로 얼마 전 “예수도 소수자였다”라는 타이틀로 언론에 보도된 속칭 '81개 기독교 단체의 성명'이 그것이다. 사실 교계 안에서는 이러한 슬로건이 성경적이지 않고 무시할 만한 것으로 치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슬로건의 대상이 교계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비기독교인들을 향해 공감을 얻어내려는 것이라는 사실에서 그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들의 성경적 모순을 찾아 반박하고 사람들로 호도되지 않도록 교정해 줄 필요가 있다. 감사하게도 이들의 주장은 논리적 모순이 너무 명확하여 굳이 신학을 내세우지 않아도 일반적인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상식적인 수준에서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포괄적 복음이다? 팩트체크

특히나 오늘 지면에서 살피고자 하는 것은 저들이 주장하는 '포괄적 복음'이다. 이들은 “그 누구도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포괄적 차별금지법/평등법'은 그 누구도 주님의 은혜로부터 배제돼서는 안 된다는 우리 시대의 '포괄적 복음'”이라고 성명에서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에 논리적 오류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바로 '포괄적'이라는 말을 수식어로 붙이고 있는 오류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복음에 '포괄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이 왜 오류일까? 그것은 이미 복음이라는 개념이 포괄성을 수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이는 삼위 하나님께서 세우신 인류의 죄를 해결할 유일한 길이며, 하나님은 인류가 개개인의 믿음을 통해 그 생명을 얻도록 해주셨다. 그러므로 애초에 복음은 그 능력과 범위상 구원하지 못할 죄인은 이 세상에 없다. 개인이 믿지 않을 수는 있어도 복음이 구원하지 못할 죄인이 있다면 그 때부터는 복음일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복음'이라는 개념 안에 이미 탑재된 모든 죄인을 향한 복음의 '포괄적 요소'이다.

생각해보자. 복음은 한 번도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았다. 약자에게는 복음을 들을 수 없도록 철책을 치지도 않았다. 오히려 복음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는 말씀처럼 우리 모두가 죄인인 것과 고로 모든 사람은 복음이 필요함을 잘 드러내고 있다.(롬 3:23)

결국 복음은 이미 포괄적이기 때문에 포괄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그 의미가 축소되고 어긋나게 된다. 이는 지극히 의도적으로 복음의 가치를 변질하려는 속내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기존 교회가 '죄'를 가지고 동성애자들을 낙인찍는 것은 차별이기 때문에 '가짜 복음'이고, 자신들이 말하는 '포괄적 복음'은 그들을 사랑으로 품기 때문에 '진짜 복음'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예수님께 씌워진 가짜 복음을 거둬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 먼저는 진리를 대하는 우리 스스로의 각성이 필요할 것 같다. 왜냐하면 지금 눈 앞에서 예수님에 '소수자'라는 프레임이 씌워져 있음을 보면서 교회는 너무도 잠잠하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가 '교회의 머리'가 누구이신지 알고 있다면 그 이름을 농락하는 어떠한 경우도 강력히 대응하는 것이 교회가 가져야 할 당연한 태도일 것이다.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님께 드리워진 '소수자 프레임(가짜 복음)'을 거둬내 드리는 것이다. 또한 복음을 변질하는 저들의 논리를 날카롭게 반박하고 진리의 증인으로 서야 할 것이다. 이는 우리의 숙명이기도 하다. 복음 앞에 선 자가 진리를 건드리는 이러한 행동에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것은 증인로서의 본분을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복음기도신문=크리스찬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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