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일 예배 설교(2020. 8. 23) ❋ 김요셉 원천침례교회(수원) 목사

"오직 겸손"


(마태복음 18장 1-14절)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1 (없음)
12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 마태가 기록한 마태복음은 시제(時制, Tense; 시간의 흐름, 즉 어떤 사건이나 사실이 일어난 시간의 순서에 맞춘 것)로 정리된 복음서가 아니라, 주제(제자 훈련 교본으로서 제자들이 터득해야 할 각각의 핵심 가치와 삶의 모습)에 맞춰진 복음서다.
- 오늘 본문이 나오는 마태복음 18장도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주제 중심의 기록인데, 이 가르침을 두 주제, 곧 '겸손'과 '용서'로 요약할 수 있다. 겸손과 용서를 제자들에게 훈련하기 위해 주신 가르침이다.
- 겸손과 용서는 동전의 양면과 같으며, 실과 바늘처럼 떼려야 뗄 수 없다. 겸손한 마음이 용서의 마음을 이끌어낸다. 우리가 예수님의 '오직 겸손'한 마음을 올바로 닮지 못하고 제대로 회복하지 않으면, 성경적인 용서하는 삶으로 승화할 수 없다.
- 그런데 우리는 성경적인 겸손을 제대로 알고 있을까?


1. 헛다리짚은 제자들의 질문


(마 18: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 오늘 본문 1절에서 제자들이 예수께 나와서 "천국에서는 누가 큰 사람입니까?' 하고 질문한다. 제자들은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
- 17장 앞부분에서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신 사건,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시는 사건이 일어난 뒤에 뒷부분인 22절과 23절에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다시 이르시는 말씀이 나온다.
-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자신이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날 것이라고 다시 말씀하시니까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게 되었다(마 17:22-23).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고 3일 만에 부활하신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결코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 예수님의 사역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오가는 움직임 속에서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 곧 십자가 사역을 향해 점점 더 가까이 가고 있었다. 복음서를 유심히 살펴보면, 예수님의 사역은 마지막 일주일, 그러니까 고난 주간부터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는 그 일주일을 위해서 나머지 복음서의 분량이 집중되고 예수님의 가르침이 모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17장 뒷부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에 대한 두 번째 이야기가 나오고(22-23절), 끝부분에는 예수님도 성전 세금을 내야 하느냐는 이야기(24-27절)가 나온다.
- 그런데 제자들은 왜 18장에 와서 느닷없이 천국에서 누가 크냐는 질문을 예수님께 했을까?
- 사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집중하여 가르치고 싶었던 것은 십자가 곧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한 것이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의 길을 제자들에게 계속 가르쳐 주고 싶은데, 제자들의 생각은 아직 이런 예수님의 주파수에 맞춰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아직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예수님은 좀 더 노골적으로 십자가를 향하신 그분의 인생 목적을 제자들과 나누고 싶어 하셨던 이 시기에 제자들은 완전히 '동상이몽'의 상황이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가르쳐 주고 싶은데, 제자들은 아직도 'Status(신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자기들이 꽤 익숙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은 실은 서로 도토리 키 재기 하고 있는데도 그들의 굴절되어 버린 시각이 잘 교정되지 않았다. 살아가는 시대적인 상황 속에 신분(Status)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 마침 성전 세금 때문에 예수께서 세상 임금들이 신분에 따라 세금 징수를 하느냐 마느냐에 대해 하신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들의 생각은 천국에서 자기네 신분의 높고 낮음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제자들에게는 익숙해져 있던 생각의 틀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유권 해석하고 있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주파수에다 자신의 생각을 맞추고 있었다. 그 주파수는 신분과 지위에 대한 것이었다.
- 예수님이 성전 세를 내는 문제를 비유로 드셨다. 그 비유에 임금과 아들이 나오니까, 귀를 쫑긋 세우고 주파수를 맞춘다. 세상 임금이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이 하나님의 새로운 왕국에 대해 말씀하신 것에 제자들의 주파수와 생각이 맞춰졌다. 그들의 생각은 '천국 가면 누가 높은 신분을 갖고 있느냐'에 이르게 된다. 신분이 있으면 특권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런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이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 하고 질문하게 된 것이다.
- 오늘날 우리도 생각 외로 신분에 대한 가치가 강화된 문화 속에 살아가고 있다. 우리 사회도 신분이 올라가고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일수록 신분 상승과 성공에 더욱 민감하다.
- '백' 문화는 비단 한국만의 이슈가 아니다. 평등주의 원칙이 강한 미국에서도 종종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무엇을 아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아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 우리의 신분을 지속적으로 고려하게 하는 요소가 많이 있다. 비행기를 타도 마일리지 많은 사람이 좋은 자리에 앉는다. 식당에 가도 단골손님만 받는 예약석이 따로 있다. 백화점에 가면 VIP 고객은 주차 서비스를 받고 전용 출입구로 들어간다. 서울의 어떤 식당에는 특정 신용카드가 있어야 입장이 가능하다.
- 신분은 우리를 '있어 보이게' 하는 매력이 있다. 누구나 '있어 보이고' 싶어 한다.
- 그래서 제자들도 성급하게 천국에서는 누가 클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그들은 문화적으로는 헬라권(앎으로 얻게 되는 신분), 정치 군사적으로는 로마권(힘과 관계로 얻게 되는 신분), 종교적으로는 유대권(규율과 생활 방식으로 얻게 되는 신분)의 세 문화의 충돌 속에서 각각 다른 신분 놀이에 적응해 왔기에, 당연히 천국에도 새로운 신분 기준이 존재할 것으로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이 질문이 얼마나 얼토당토않으셨는지 모른다.


2. 정곡을 찌르시는 예수님의 답변


(마 18:2-4)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 '동상이몽' 같은 제자들의 느닷없는 질문에 예수님도 정곡을 찌르시는 '동문서답' 같은 답변을 하신다.
-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3절)
- 천국에는 딱 한 가지 기준만 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기준은 한 가지밖에 없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어린 아이처럼 되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천국에서 살아가는 기준은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것도 예수님이 한 어린 아이를 불러서 그들 가운데 세우며 말씀하신 것이다(2절).
-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4절)
- "누가 큰 사람입니까" 하는 질문은 아예 하지도 말아야 하고,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 곧 신분(Status)이 없는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이어야 천국에서 큰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 우리 안에 어린이는 순진하다, 정직하다, 착하다는 고정 관념이 있다. 예수님은 어린이처럼 순진하고 정직하고 착해야 천국에 들어가서 큰 사람이 된다는 의도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 그렇다면 어린 아이를 세우시면서 이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뜻은 무엇일까?
- 예수님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기준으로 말씀하신 어린 아이는 '작은 자'를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 마태 시대에 예수께서 어린 아이를 예로 들면서 제자들에게 주려고 하신 메시지는 하나다. 아무런 신분이 존재하지 않는 '작은 자'를 강조하신 것이다. 보잘것없는 존재, 존재감 없는 존재가 어린 아이다. 천국은 어린 아이처럼 자신이 어떤 신분도 어떤 자격도 어떤 능력도 가지지 못한 존재임을 철저하게 인정하지 않으면 입장이 되지 않는 곳이다.
- 천국에서는 신분 부재가 유일한 신분이 되는 곳이다. 내가 가진 공로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로로 받아들여지고 사랑을 받을 자격이 주어지는 곳이 천국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용납과 하나님의 인정하심이 아니면, 아무런 존재가 될 수 없는 존재, 이것이 천국에서의 가치인 것이다. 이것이 천국적인 겸손의 정의다.
- 겸손(Humility)은 당시 로마나 헬라 문화에서는 이질적인 것이었다. 고대 문명 속에서는 겸손이란 단어가 좋은 가치로 인정받지 못했다. 오로지 예수님의 등장과 십자가의 사건이 겸손을 그 사회의 가치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 존 딕슨은 겸손을 이렇게 정의한다. "겸손은 우리의 신분을 포기하기를 결심하는 결정이다. 자기보다 다른 일을 위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분을 의도적으로 선택적으로 포기하는 것이다."
- 겸손에는 세 가지 요소, 존엄과 자원, 그리고 타인을 향한 마음이 공존해야 한다.
- 자신이 가진 능력이나 존엄을 선택적으로 타인의 배려를 위해 포기하는 것이 겸손이다.
- 최근 우리 사회에 일어나는 일련의 일을 지켜보면서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이 있음을 발견한다. 교회가 욕을 먹고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잘못 했다는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혹시 우리 안에 발뺌하는 마음, 혹시 우리 안에 이것을 좀 피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신분을 유지하려는 동기에서 나오는 것은 아닌지, 사회적으로 있어 보이는 집단이 되고 싶은 동기가 우리 안에 있지 않은지 모르겠다.
- 자신이 가진 능력이나 존엄을 하나님을 위해 또 이웃을 위해 선택적으로 포기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제자들과 우리에게 전달해 주려고 하셨던 겸손의 모습이다. 이것이 '오직 겸손'이다.


3. 겸손의 마음의 소유자만이 겸손한 존재를 영접한다


(마 18:5-6)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 같이 신분의 없음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다른 작은 자들을 포용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 예수님의 겸손하심, 예수님의 작아지심을 삶으로 경험하여 겸손한 마음을 가진 자만 다른 작은 자를 영접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께서 우리가 가길 원하시는 방향인 것이다.
- 예수님의 삶의 방식으로 따르는 제자가 되려면 무엇보다 겸손을 터득하여야 한다.
- 체면 문화, 신분 문화 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 마음으로 작은 자를 포용하지 못하고 자신이 가진 능력이나 존엄을 사회의 작은 자를 위해 선택적으로 포기하지 못하여 어느덧 신분(Status) 교회로 전락해 버린 한국 교회가 오늘날 이 상황 속에서 교회의 정체성을 새롭게 발견해야 된다고 믿는다.
- 교회 안에서도 신분이 있고 서열이 있으며, 교회 안에서도 서로 좋아하고 편하게 선택하며 어울릴 수 있는 그룹이 따로 있다. 이렇게 되어 버린 한국 교회와 오늘도 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욕먹는 사람, 어려운 사람,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접하고 품어 주며 함께하는 교회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설교요약/정리: 안재환 (원천침례교회 집사, 흥사단 부이사장)
▸영문자막 번역/정리: 노승빈 (크리스찬타임스 한국후원회 회장, 백석대 교수)
정두준 (크리스찬타임스 한국후원회 영문서기)
Eli Lee (크리스찬타임스 한국후원회, Deloitte 리스크자문본부)
▸영상편집: 강한빛 (크리스찬타임스 한국후원회 영상편집팀장, 오롯영상프로덕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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