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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셉 목사 3분 설교 메세지

"성경적 용서의 근거"

크리스찬타임스 | 등록일 2020년09월10일 22시01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 주일 예배 설교(2020. 9. 6) ❋  - 김요셉 원천침례교회(수원) 목사 -


"성경적 용서의 근거"
(마태복음 18장 21-27절)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 사실 오늘날 우리 문화는 용서의 가치를 상실한 문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적인 보복은 당연시될 뿐만 아니라 정당화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사회적 가치와 기준에서 보면, 단순히 직접 가해한 사람에게 피해자가 응징할 권리가 있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포괄적인 응징까지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 이런 문화 기저 속에서 누가 감히 성경적인 용서를 말할 수 있을까? 용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의 중심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그래서 용서는 복음의 핵심이다.


  1. 자가 용서의 한계를 자각하라(21-22절)


- 네 복음서 중에 마태복음이 유난히 베드로의 양면성을 많이 보여 준다. 마태복음만 베드로가 물위를 걷다가 물 속으로 가라앉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마 14:22-33). 또 마태복음만 베드로의 고백으로 예수님께 받은 인정과 십자가 부인으로 인한 꾸중을 같이 기록하고 있다(마 16:13-23).
- 눈치 빠른 베드로가 예수님이 용서를 중요하게 여기심을 파악한 것은 높이 평가하고 칭찬할 만하다. 그렇지만 용서에 대한 베드로의 생각이 예수님의 생각과는 차이가 너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대부분의 사람은 용서에 대해 잘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이 용서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잘 포착하여 용서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 바로 앞에서 예수님이 '형제가 죄를 범하면' 어떻게 하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이번에는 베드로가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지 물어본다. 베드로의 질문에서 그의 통찰력과 함께 한계를 엿볼 수 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21절)
- 이러한 베드로의 양면적인 모습에서 우리가 용서에 대해 접근하면서 범하는 첫 번째 잘못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자가(자기 자체) 용서의 한계를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 성경적 용서의 첫 번째는 자가 용서의 한계를 자각하는 것이다.
- 우리는 자가 용서, 자기 스스로 하겠다고 하는 용서의 능력과 가능성이 얼마나 제한적이고 한계가 있는지 제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왜 그럴까? 베드로의 질문 속에서 그 한계를 볼 수 있다.
-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22절) 예수님은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하라고 가르치신다. 이것은 어떻게 해서든 많이 용서하라, 쉬지 말고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결국 무한대의 용서를 베풀어라, 용서의 한계를 두지 말고 끝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용서에 대한 가치를 베드로는 자기 생각의 틀 안에서 파악한 것이다. 이것이 자가 용서의 한계다.
- 우리는 스스로 갖고 있는 용서에 대한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내가 이만큼 용서하고 있다는 자가 용서, 자각적인 용서가 하나님의 생각, 예수님의 생각과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 난다는 것을 잘 모른다. 우리가 용서에 대해 그런 한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나는 용서를 많이 하고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용서에 대하여 크게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는 분이 별로 없다. 나는 용서를 잘하고 있고, 용서를 많이 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용서에 대하여 좋게 생각한다.
- 베드로도 자가 용서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당시 바리새인은 두 번까지는 무조건 용서를 해야 하고, 정말 은혜를 베풀고 싶다면 세 번까지만 용서하면 된다고 가르침을 받았다. 베드로도 그런 크고 도량 있는 배려의 기준을 알고 있었다.
- 그러나 용서에 대한 다른 가치를 가지신 예수님과 함께 3년을 보냈던 베드로는 자신이 갖고 있는 용서의 기준을 최대한 올려서 예수님께 묻는다. 베드로는 최대 횟수의 두 배(3×2)에 한 번을 추가로 더하면서(6+1) 자신이 상당히 너그럽게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정도면 예수님도 인정해 주실 줄 알았다.
- 우리는 자가 용서의 한계를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용서의 기준을 내 용납의 한계에 맞추고 있다. 한두 번은 봐 줄 수 있다. 그러나 몇 번의 상처는, 그리고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상처는 용서하지 못한다.
- 우리의 용서는 상대방의 자세나 태도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도 많다. 아이들이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부모에게 용서를 빌지 않는다. 그러면 그 잘못을 끝까지 추적하고 아이가 용서를 빌 때까지 정신적 육체적으로 보이지 않는 고문을 하는 부모의 모습을 많이 본다.
- 하나님의 용서는 공의와 더불어 공존한다. 하나님의 용서는 무조건적이고 은혜적인 것이다.


  2. 하나님의 용서를 제대로 받은 자만이 용서한다(23-27절)


- 베드로가 앞에서 자가 용서의 한계를 보여 주었는데, 예수님이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23-35절)를 들어 용서에 대한 두 번째 가르침을 주신다.
- 한 부유한 왕이 자기에게 빚진 자들과 결산한다. 한 종이 10,000달란트를 빚졌다. 종이 갚을 능력이 없자, 왕은 그 종의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가진 것을 모두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한다. 종이 왕에게 "조금만 참고 시간을 주십시오. 그러면 다 갚겠습니다." 하고 간청한다. 우리는 종이 '용서'를 구하지 않고 '시간'을 구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하지만 왕은 종을 불쌍히 여겨 용서하고 빚을 몽땅 탕감해 준다.
- 성경적 용서의 두 번째는 하나님의 용서를 제대로 받은 자만이 용서한다는 것이다.
- 저는 예수님의 얼토당토않은 이 비유가 하나님의 용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생각으로만 용서를 하려는 베드로와 우리 생각의 틀을 깨뜨리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비유는 우리의 이해를 돕고 고정 관념을 일깨워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생각과 고정 관념을 완전히 깨뜨리기 위한 것이다.
- 예수님 시대에 1달란트는 60무나와 같았다. 1무나는 3개월 치 임금이었다. 1달란트는 노동자 한 사람의 180개월(60무나×3개월/무나), 곧 15년(180개월÷12개월/년) 치 임금이다. 따라서 10,000달란트는 150,000년 치에 임금이다. 그런 엄청난 빚인데 종은 제발 갚을 시간을 달라고 한다.
- 그런데 종은 어떻게 그런 엄청난 액수의 빚을 질 수 있었을까? 아마도 10,000달란트의 빚은 자신의 시대가 아니라, 대대로 물려받은 빚을 다 합친 금액일 수도 있을 것이다.
- 우리는 용서를 구할 때 자신이 어떻게 해서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우리의 죄와 잘못, 우리가 임금 되신 하나님께 진 빚,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하는 빚은 우리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이다.
- 우리는 내 죄를 용서받은 것, 하나님께서 내 죄를 용서해 주신 것에 대하여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지은 죄에 대해서 유권 해석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조차 내로남불 하고 있다.
- 우리는 내 죄는 크지 않다거나 나는 별로 죄를 짓지 않았다고 착각한다. 물론 성경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표준에 미치지 못하였다"(롬 3:23)고 가르치는 것을 신학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정작 하나님 앞에 내가 죄인이라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또 내 죄를 얼마만큼 용서받았는지도 모른다.
- 물론 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우리가 원조부터 지금까지 쌓아온 죄가 있기 때문이다.
- 몇 대째 물려받은 원죄의 죗값을 지불해야 되는 것도 있지만, 내가 공범으로 죄를 짓고 있는 것도 있다. 나는 지금도 편리함 때문에 나도 모르게 하나님이 주신 세상을 파괴하고 있는 장본인 곧 공범이 되고 있다.
- 내가 지은 죄가 있고 앞으로 지을 죄도 많다. 내가 지은 죄, 앞으로 지을 죄, 그동안 지었던 죄, 같이 지었던 죄, 위에부터 지었던 죄, 내 자녀에게 물려주고 있는 죄 등등, 나에게 얼마나 많은 죄가 있는지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을 잘 보아야 한다.
- 종은 자기가 빚을 갚을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결코 갚을 수 없다. 우리가 지은 죄는 우리 손으로 다 갚을 수 없다. 우리가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죄인이라서 죄를 짓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엄청난 우리의 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죄를 모두 용서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고 원수 되었을 때에"(롬 5:6,10) 벌써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공격하고, 하나님께 잘못한다고 손가락질을 하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들면서 교만한 마음을 갖고 있을 때에 이미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 주셨던 것이다.
- 왕은 종을 조건 없이 용서하고 빚을 탕감해 준다. 당연히 용서받은 자가 감사하며 'Forgiving forward'을 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 놀랍게도 용서받은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빚진 동료를 만난다. 그 사람이 진 빚은 100데나리온이었다. 1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임금으로 이 빚은 100일 치 임금, 곧 오늘날로 말하자면 대략 1천 3백만 원 정도였다. 이미 용서받은 자가 그랬던 것처럼, 이 사람도 빚 갚을 기회를 달라고 간청한다. 이 정도 금액은 실제로 갚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하지만 갚을 수 없는 빚을 용서받은 자가 갚을 수 있는 빚을 용서하지 않는다. '내리 사랑(Forgiving forward)' 하기를 거절하고 동료이자 빚진 자를 옥에 가둔다.
- 하나님은 용서받은 사람이 용서하길 원하신다. 성경적인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기를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통찰하는 데서 시작된다. 하나님은 복음으로 용서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의 죄가 용서받을 만한 죄임을 인정하고 용서하길 원하신다. 복음으로 용서를 받은 사람은 자기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것인 만큼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의 작은 잘못도 용서해 준다.
- 이렇게 용서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가 용서하는 것이 왜 그리 어려울까? 우리가 복음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복음을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 제가 용서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고 용서를 잘 하지 않고 있는 제 모습이 어디서 나올까 생각해 봤다. 저는 머리로나 입으로 고백하는 나의 신조와 믿음, 성경 안에 있고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 나의 복음에 대한 사실을 실제적으로는 잘 믿지 않는다. 그래서 저는 실질적 무신론자, 실질적 비복음자라고 생각한다.
- 저희 부부가 안식년을 보내면서 한 커플을 만나서 <Forgiving Forward>라는 책을 통해 훈련을 받았다. 'Forgiving forward'를 우리는 '내리 사랑'으로 번역하고 있다. 'Forgiving forward'는 하나님께 받은 용서를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며, 내가 하나님께 받은 용서를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받은 용서를 통하여 내 주변에 있는 사람, 아내와 자녀, 부모와 형제(자매), 이웃과 성도, 심지어 나에게 상처 입히는 다른 사람에게까지 내가 받은 하나님의 용서를 다시 나누는 것이다.
(요일 2: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모든 죄를 덮어 주신다. 심지어 우리가 당한 죄의 상처까지도 덮어 주신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내 죄를 온전히 용서해 주시고 깨끗이 씻어 주신 것을 믿는다면, 그 보혈이 내 죄만을 씻어 주신 것이 아니라 나에게 상처 입힌 다른 사람의 죄까지 씻어 주신 것도 믿어야 한다.
- 내가 용서를 한다는 것에서 한 가지 사실은 부인하고 있다. 내 죄를 용서해 주신 예수님의 보혈이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의 죄도 용서해 주셨다는 것은 믿지 않는다. 복음을 안 믿는 것이다. 내 죄는 용서해 주셨지만 나한테 상처를 입힌 죄는 예수님의 보혈이 씻어 주실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그 죄를 용서해 주셨지만 나는 그것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다.
- 예수님의 보혈이 모든 죄를 덮어 주신다고 믿는다면, 내가 당한 죄의 상처와 나한테 입혀진 그 죄의 아픔도 예수님의 보혈이 씻어 주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복음,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이 정말 내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을 믿는다면, 용서는 옵션 곧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다. 그 복음의 능력이 내게 상처를 입힌 사람의 죄도 이미 하나님이 용서해 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용서를 더 주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신 것에는 정말 빙산의 일각, 새발의 피도 되지 않는 내 작은 빚을 내가 받은 은혜로 갚아 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다


▸설교요약/정리: 안재환 (원천침례교회 집사, 흥사단 부이사장)
▸영문자막 번역/정리: 노승빈 (크리스찬타임스 한국후원회 회장, 백석대 교수)
    정두준 (크리스찬타임스 한국후원회 영문서기)
    Eli Lee (크리스찬타임스 한국후원회, Deloitte 리스크자문본부)
▸영상편집: 강한빛 (크리스찬타임스 한국후원회 영상편집팀장, 오롯영상프로덕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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