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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조선, 구한말 미국 선교사 열전 67

Henry M. Bruen (부해리 傅海利 선교사) ①

크리스찬타임스 | 등록일 2020년09월12일 00시42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Henry M. Bruen. 1874-1959 (Entering Korea in 1899)

 


Henry M. Bruen

 

부해리 선교사의 원래 이름은 브루엔(Henry Munro Bruen, 1874~1959 부해리(傅海利))이며, 부해리 선교사는 조선(한국)에 와서 지은 이름이다. 그는 1874년 미국 뉴저지(New Jersey) 주 서미트(Summit)에 위치한 중앙 장로교회의 담임목사로 있던 제임스 브루엔(James DeHart Bruen)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그후 12세 때 어머니(Margaret White Munro Bruen)의 별세로, 할머니인 안나 브루엔(Anna Miller Bruen)의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그의 조부(James McWhorter Bruen 또한 목사였으며, 조모는 당시 저명한 성경학자였으며 교회학교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선교 악단(Mission Band)을 조직하여 가르치기도 했을 정도로 열성적이었고, 부해리 선교사의 가정은 할머니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부해리 선교사는 1892년 장로교 기숙학교인 블레어 홀 아카데미(Blair Hall Academy)에서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22세 때인 1896년 프린스턴(Princeton University) 대학을 졸업하였다. 그후 그의 부친과 조부가 졸업한 뉴욕의 유니언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하여 신학공부를 한 후 1899년 졸업하고 그해 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어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 조선(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그해 10월 26일 경상지역을 위한 세 번째 선교사로 대구에 도착하여 안의와 선교사, 장인차 선교사 등과 함께 대구, 경북지역 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대구는 1899년 5월 1일 조선(한국)에서는 4번째로 선교기지인 스테이션(Station)이 공식 개설된 곳으로, 이미 1897년부터 선교기지로서 실질적인 활동을 해 왔었다. 대구는 이미 조선시대부터 행정, 경제, 교통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선교기지가 개설됨으로써 개신교 선교의 중심지 역할까지도 담당하게 되었다. 
 

25세 미혼 총각의 몸으로 대구에 도착한 브루엔 선교사는 그후 한국식 이름을 부해리(傅海利)로 정하였는데, 이는 그의 애칭인 해리 브루엔(Harry Bruen)에 발음이 가장 가까운 말을 딴 것이었다. 그는 2년 후인 1901년 그의 약혼자이며 동창생인 마르타 브루엔(Martha Scott Bruen, 1875~1930 부마태(傅馬太))과 결혼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고, 이듬해 5월 대구에 돌아왔다. 그들은 슬하에 두 딸을 두었다. 1902년 5월 대구에 온 부해리 선교사는 선교사들 간의 경북지방 선교 구역 분할로 경북 서부지방, 즉 김천, 선산, 군위, 고령, 성주, 상주, 칠곡 등지의 선교를 담당하여 수많은 교회를 설립하였다. 그 외 경산, 영천, 포항 등의 동부지방은 안의와 선교사가, 그리고 안동, 봉화, 영주 등지의 북부지방은 1902년 대구 선교기지에 임명되어 온 바렛 선교사(W.M. Barrett, 1872~1956 방위렴(邦緯廉))가 맡게 되었다. 
 

1903년 부해리 선교사는 안의와 선교사의 후임으로 대구 제일교회를 담임하였고, 1904년에는 대구 성경학원(聖經學院)의 남자 조사반(助事班)을 맡아 수업을 진행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 의료 선교사로 부산에서 활동하던 어빈(Charles H. Irvin, 1862~1933 어을빈(魚乙彬)) 선교사와 빈턴(C.C. Vinton, 1856~1936 빈돈(賓頓)) 선교사 등과 함께 1916년까지 나환자 선교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12년 1월 경상노회(慶尙老會) 조직에도 크게 기여하여 1913~14년에는 경상노회 7, 8회 노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또한 1915년에는 대구 남산교회를 세워 담임목사가 되었으며 이후 1920년까지 당회장으로 시무하였다. 
 

한편 부해리 선교사의 부인 부마태 여사는 미국에서 결혼한 후 1902년 5월 대구에 부임하여, 그해 제일교회 구내에서 신명여자소학교(信明女子小學校, 현재 종로초등학교)를 세웠다. 이후 1907년 10월에는 동산(東山) 위의 5칸 짜리 일자형 한옥인 부인용 사랑채를 교사(校舍)로 하여 신명여자중학교(信明女子中學校)를 설립하여 특히 교육부문에서의 선교활동에 힘썼다. 이로 인해 현재까지 그녀는 대구, 경북지방 여성교육의 창시자로 불리고 있다. 또한 남문안 예배당의 여자 주일학교 교장, 부인전도회 및 경북 여전도회 연합회의 조직과 운영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1930년 10월 유방암으로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결국 55세의 나이로 28년 동안의 대구생활을 마감하고 소천하였다. 부마태는 평소 “선교 사업에 자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부해리 선교사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가 하는 일을 힘껏 도와주고 싶은 한가지 욕망 때문에 대구로 간다”고 했을 정도로 부해리 선교사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사람이었다.
부해리 선교사 부인 부마태 여사의 유해는 동산의료원 구내의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묘비의 원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마르다 녀사는 一八七五년 四월 十일 미국 펜셜페니아쥬 화잍헤빈셩에셔 츌생하여 一九○二년 五월 十일 션교사명으로 죠션에 오다 녀자 교육긔관 대구 대남 신명 두 학교를 셜립하고 부군 션교사 부해리와 함긔 교회사업에 종사하다가 一九三○년 十월 二十일 별세함’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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