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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셉 목사 3분 설교 메세지

"성경적 용서의 방향"

크리스찬타임스 | 등록일 2020년09월18일 23시15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 주일 예배 설교(2020. 9. 13) ❋

- 김요셉 원천침례교회(수원) 목사 -


"성경적 용서의 방향"


(마태복음 18장 28-35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 예수님의 10,000달란트 빚진 '용서할 줄 모르는 종' 비유를 연극으로 연출하면, 1막과 2막으로 꾸밀 수 있다. 지난주에 본 제1막은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는데도 상상할 수 없는 10,000달란트의 빚을 모두 탕감 받은 종이 받은 은혜를 조명하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성경적 용서의 근거', 성경적 용서의 시작점은 우리가 아니라 엄청난 죄의 빚을 탕감해 주신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자신의 엄청난 죗값을 탕감 받은 사람만이 성경적인 용서를 제대로 실천하여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함께 보았다.
-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 예수님의 비유 제2막을 통해 '성경적 용서의 방향'에 대해 함께 보길 원한다. 제2막은 엄청난 액수인 10,000달란트 빚을 지었던 종이 그 빚을 탕감을 받고 나서 일어난 이야기다.
- 성경적인 용서는 무엇일까?


  1. 성경적인 용서는 당한 죄의 상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28-30절)


- 우리가 용서는 참 소중한 것이라 생각하고 이제 용서해야지 하는 의무감으로 용서에 접근할 때, 정작 용서하려는 만큼의 아픔, 죄의 상처를 받으면 쉽게 용서되지 않는다. 우리가 당한 아픔과 상처는 가상이 아니라 실제라서 그렇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비유에서 성경적 용서의 방향에 대한 첫 번째 가르침을 발견한다.
- 성경적인 용서는 당한 죄의 상처와 아픔을 무시하거나 덮으라는 것이 아니다.
- 10,000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고 나온 종에게 100데나리온의 빚을 진 동료가 있다. 100데나리온의 빚은 실제적으로 손해를 본 것이고, 반드시 갚아야 하는 빚이다. 100데나리온은 그 자체로 볼 때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다. 1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나 군인의 하루 일당인데, 100데나리온은 100일 치 일당으로 큰돈이다. 누구나 100일 치 일당에 해당하는 빚을 갚지 않으면 큰 손해를 입게 된다.
- 우리가 경험한 죄의 아픔들이 크다. 지난주에 인용했던 의 저자 Hebel 부부는 법정에서도 승소할 수 있는 증거를 가진 상처와 아픔을 교회에서 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부부가 용서의 길로 인도한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 속에는 더욱 큰 패륜적인 아픔을 경험한 사람이 많이 있다.
- 우리가 스스로 용서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의 하나는 실제로 받은 상처가 몹시 크고 아프기 때문이다. 용서를 마치 큰 아픔을 준 것 자체를 무시하거나 없는 것처럼 여기라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게 아니다.
- 성경적인 용서는 잘못과 죄의 문제를 은폐하거나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것을 무시하고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용서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피해자인 내가 받은 피해의 상처를 무시하는 것이 성경적인 용서의 중심이 아니다.
- 용서의 대명사, 사랑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져 있는 손양원 목사는 두 아들을 죽인 청년을 용서했다. 손  목사의 두 아들을 무고하게 죽인 청년 안재선의 만행은 결코 작은 죄가 아니었다. 손 목사 부부는 물론이요 그 가족 모두에게 동인, 동신 형제의 죽음은 엄연하게 크나큰 상처고 말할 수 없는 상실이었다. 그리고 그 잘못을 저지른 자들에게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책임이 없어진 것도 아니었다.
- 사랑의 관계를 기대하고 있을 부모나 배우자에게 당하는 말할 수 없는 아픔(학대나 불륜과 배신)은 실제로 큰 죄다. 절대로 그냥 덮어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인 지탄과 실제적인 죗값을 치러야 하는 것을 배제하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 성경적 용서는 그 잘못과 죄를 덮어 버리거나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아니며, 그 죄가 실제로 존재하고 그 죄에 대해 공의로운 죗값을 반드시 치러야 함을 간과하는 것이 아니다.
- 용서하라고 가르쳐 주신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내가 그 죗값을 반드시 갚아 주겠다. 공의로 그것을 심판하겠다. 그러니 원수 갚는 것을 내게 맡기라."(롬 12:19)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도 신뢰해야 된다.
- 그런데 용서는 우리가 아량이 넓고 아픔을 억누를 힘이 클 경우에 하는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하는 중요한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 것이다. 용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얼마나 철저하게 신뢰하고, 그 말씀이 진리라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할 수 있든지 할 수 없든지 하는 것이다.
- 용서는 죄의 아픔과 상처를 무시하거나 덮으라는 것이 아니다. 성경적인 용서가 그런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죄를 반드시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이 같은 근거가 성경적 용서의 방향에서 첫 번째 포인트다.


  2. 성경적인 용서는 피해자와 가해자로 나뉜 정체성을 넘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다(32-33절)


- 오늘 본문 32-33절에서 임금(주인)이 하는 말 속에 분명한 교훈이 있다. 우리의 관심과 초점이 나와 내 동료에게만 있을 때 문제라는 것이다.
- 오늘 우리 삶 속에서 크리스천조차 얼마나 인본적인 가치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고 있는지 보기를 원한다.
- 우리 사회는 이분법적 시각만을 강조한다. 그 뿌리에는 본질적으로 모든 사람은 무죄하다(innocent)는 인본적인 가치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 우리는 피해자와 가해자로 이분해서 세상을 살아간다. 우리는 내가 피해자면 잘못이 없고 가해자면 잘못이 있다는 상황에 매우 익숙해져 있다. 내가 당한 잘못은 확실한 잘못이다. 명확한 증거도 있고 심지어 주변 사람의 동정도 적지 않다. 그래서 내가 당한 그 상황 속에서 '나는 피해자'라는 정체성은 당연하다. 
-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 정체성을 바라볼 때, 과연 순수한 피해자일까? 그건 아니라고 본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수님께 더 말할 수 없는 큰 아픔과 상처를 안긴 가해자라는 정체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에 우리 안에 성경적인 용서가 가능하지 않는 것이다.
- 성경적 용서의 근거와 방향은 바로 복음이 말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가해자인 죄인이며, 하나님 앞에 이룰 수 없는 가해자의 신분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조명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 그런데 우리는 이 복음을 머리로 알고 있고 신학적으로도 알고 있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에서 알려주고 있는 정체성에 빠져 있다. 그것은 내가 피해자면 무죄하다는 정체성이다. 나는 죄가 없다, 나는 잘못이 없다, 나는 가해하지 않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이분법의 정체성에서 탈피하고 초월하고 그것을 더 확대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 말할 수 없는 죄를 지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보아야 한다.
- 성경적인 용서는 피해자와 가해자로 나뉜 정체성을 넘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인본적인 관점에서 지엽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가해와 피해의 프레임을 잡는다. 우리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당한 피해에 집중함으로써 가해자와 피해자의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것이다.
- 왜 우리는 이렇게 내가 입은 피해는 잘 보지만 내가 입히고 있는 가해는 잘 보지 못하는 것일까? 더 본질적으로 피해자와 가해자의 정체성으로만 이분화 하는 우리 삶 속에서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하나님께 가해한 엄청나게 큰 상처다. 원초적으로 하나님 앞에 그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려 돌아가실 수밖에 없도록 하는 큰 죄로 하나님을 가해한 내 모습을 올바로 보지 않으면서, 나는 무죄하며 아무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우리 마음은 어디서 나왔을까?
- 이러한 우리의 상처에 대한 반응은 성경에서 그 역사적 뿌리가 깊다.
- 하나님이 동생 아벨의 제사를 받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자 가인은 동생을 쳐 죽였다. 자신의 피해가 자기 잘못을 은폐하는 핑계로 쉽게 전락된 가인은 자신이 살인의 피해자가 될 것이 두려워 하나님께 호소한다(창 4:13-14).
- 살인자 가인에게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은혜의 장치, 은혜의 보혈, 은혜의 도움을 제공해 주신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7배나 받을 것이다"고 하시며 가인을 보호해 주신다(창 4:15). 
- 그런데 창세기 4장은 바로 이어서 가인의 5대손인 라멕의 교만함을 보여 준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창 4:24).
- 항상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 피해를 입힌 가해자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피해를 입는 피해자로서 우리에겐 가해자가 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발견할 때가 많다.
- 아담의 불순종은 우리에게 내가 입은 피해로 인한 상처에 대한 아픔이 피해자로서 내가 잘못한 가해에 대한 불감증을 초래하는 것이다. 라멕은 상처 받은 피해자가 맞는다. 그러나 그 상처 때문에 자기도 한 청년을 죽인다. 그러면서 자기는 77배의 보호를 원한다. 라멕은 청년을 죽인 것을 정당화하면서 자신의 죄책감에서 보호받기 위해 가인의 7배가 아니라 77배의 보호를 원하는 마음이 생긴다. 
- 우리에게도 큰 상처가 있다. 죄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는다. 그 죄가 작다는 것이 아니다. 그 아픔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가인과 라멕의 정서가 흐르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가? 77배의 보호와 보상을 받고 싶어 한다. 이것이 우리 안에 흐르고 있는 인본주의적 삶의 근거다.
- 베드로의 질문을 통해 예수님이 초래하신 혁명이 무슨 혁명인지 아는가? 77배의 '용서 혁명'이다. 베드로가 큰마음을 먹고 7번 정도 용서로 내가 입은 피해를 덮어 버리려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이 가인과 라멕으로 이어오는 가해자와 피해자 이분법의 정서를 성경적인 77번의 '용서 혁명'으로 뒤집어 주신 것이다. 
- 그런데 여기에서 핵심은 무엇인가? 100데나리온 상처 입은 종이 자기가 10,000달란트 빚 탕감을 받았음에도 배은망덕한 악을 저지르면서 보지 못했던 것은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자기와 동료만 봤다는 것이다. 그 종과 동료의 관계 속에서 동료는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이 맞는다. 그러나 종은 자신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봐야 했다. 10,000달란트 빚 탕감으로 엄청난 죄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께 입힌 10,000달란트의 가해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제대로 바라보고, 그 잘못이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우리가 10,000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종과 같이 하나님 앞에 10,000달란트의 죄를 지은 사람이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면, 성경적인 77번의 '용서 혁명'은 바로 거기서 시작될 수 있다.


  3. 성경적인 용서를 하지 못하면 탕감된 빚에 대한 고통의 옥에 갇힌다(34-35절)


- 우리말 성경은 '옥졸'로 번역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에는 'tormentors' 곧 '고문하는 사람'으로 좀 더 명확하게 번역되어 있다.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이 그냥 감옥이 아니라 고통의 감옥에 갇힌다.
- 내가 하나님께 가해했고 지금도 가해자(죄인)로 아픔을 주고 있는 것을 간과하면서 끝까지 내게 피해를 입힌 사람에 대해 그 대가를 온전히 갚으라고 강요한다면, 나는 내가 자초하는 감옥에 다시 들어가게 된다. 그 감옥은 바로 온전히 갚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다는 죄책감의 감옥이다.
- 성경적인 용서를 하지 못하면 탕감된 빚에 대한 고통의 옥에 갇힌다.
- 엄청난 용서를 받은 안재선 씨는 죄책감의 감옥, 고통의 감옥에 갇혀 세상을 떠났다. 그 감옥은 용서하지 못하는 감옥이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감옥이다. 용서를 받았는데도 용서를 적용하지 못하는 감옥에 갇혀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다시 고통의 감옥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적용하며 살아가고, 그 용서가 내 삶에서 실제로 내게 자유함을 줄 수 있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자유함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십자가의 길밖에 없다.
- 그 십자가의 길이 우리에게 반복해서 가르쳐 주는 것이 있다. 하나님을 향한 가해자인 내가 10,000달란트 넘는 내 죗값으로 다 탕감 받았다는 77번 용서의 기적이다. 그 용서를 누리고, 그 용서를 즐기길 바란다. 그 용서를 만끽하고 자유함을 누리길 소망한다.
- 입양된 아들이었으나 용서하지 못하는 감옥에 갇혀 살다 세상을 떠난 안재선 씨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 입양되어 예수님의 제자 된 성도로 아버지의 용서를 받아서 자신만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그 용서를 나누며 예수님의 77번 '용서 혁명'을 만끽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설교요약/정리: 안재환 (원천침례교회 집사, 흥사단 부이사장)
▸영문자막 번역/정리: 노승빈 (크리스찬타임스 한국후원회 회장, 백석대 교수)
    정두준 (크리스찬타임스 한국후원회 영문서기)
    Eli Lee (크리스찬타임스 한국후원회, Deloitte 리스크자문본부)
▸영상편집: 강한빛 (크리스찬타임스 한국후원회 영상편집팀장, 오롯영상프로덕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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