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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조선, 구한말 미국 선교사 열전 68

Henry M. Bruen (부해리 傅海利 선교사) ②

크리스찬타임스 | 등록일 2020년09월19일 14시40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Henry M. Bruen. 1874-1959 (Entering Korea in 1899)

 


1939년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는 브루엔 선교사

 

그후 부해리 선교사는 부마태 부인이 별세한지 4년만인 1934년 9월 부마태의 친구이며 동산병원 간호사로 일하던 클라라 헤드버그(Clara M.Hedberg, 하복음) 선교사와 재혼하여, 슬하에 브루엔 주니어(Henry Munro Bruen Junior)를 낳았다. 하복음은 동산 기독병원의 간호 선교사로 1923년부터 간호과장으로 있으면서 1925년 10월 의무과장 손인식과 병원 사무장 김덕수의 협조로 동산 기독병원 구내에서 부속 간호부 양성소를 설립했다. 그녀는 1941년까지 그곳의 간호부 양성소 소장으로 있었으며, 모두 18년 동안을 동산병원에서 근무했다. 


부해리 선교사는 평소 성품이 매우 소탈하고 한국어로 유창하게 설교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 사람들과 그 문화에 친숙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믿음과 사랑, 인내의 선교사였다. 부해리 목사와 가깝게 생활했던 사람들은 그를 ‘천사(天使)’ 라고 표현할 정도로 이 지역 교인들과 두터운 정을 나누고 가신 분이다. 이러한 모습은 계성학교 교장을 지낸 헨더슨(현거선)의 다음 회고에서도 잘 나타난다. 

 

‘부해리는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하는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번 만난 사람의 얼굴은 좀처럼 잊어버리는 법이 없었다. 어느 날 우리 두 사람(부해리와 헨더슨)이 같이 시골길을 가고 있었는데 마침 여러 명의 사람들이 우리 옆을 지나갔다. 이때 부해리가 갑자기 돌아서더니 한 사람을 불렀다.’
 

“김영태씨! 안녕하십니까?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잠시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눈 다음 우리는 다시 길을 걸어갔다. 부해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까 그 사람은 내가 17년만에 처음 만난 사람입니다.”

 

부해리는 한국어로 성경 말씀을 인용하는 남다른 능력이 있었다. 예배시간에 성경봉독 순서가 되면, 그는 강대상 앞에 나가 봉독할 성경 구절을 먼저 말하고 교인들에게 성경을 찾게한다.(당시 한국 교인들은 성경, 찬송을 늘 지니고 다녔다) 교인들이 성경 구절을 다 찾고 나면 부해리 선교사는 성경을 보지도 않고 그 구절을 모두 외워서 낭독하였다.
 

부해리는 또한 교인들을 만나면 그때, 그 사람에게 가장 적절한 성경구절을 들려주는 습관이 있었다. 

“나(헨더슨)는 부해리와 여러 해 동안 대구 선교기지에서 같이 일하고 지냈지만 한번도 화를 내거나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정적이었고, 결코 위선적이지 않았다. 그는 진실로 기도하는 사람이었으며, 깊은 경건성을 지닌 사람이라고 모든 선교사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는 전도를 다닐 때는 자전거를 이용했는데, 그 당시만 해도 자전거가 매우 귀하여 이를 ‘안경말’ 또는 ‘비거(飛車)’라고 불렀다. 워낙 자전거가 신기하여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기회를 이용하여 다음과 같이 전도를 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놀라운 기계들이 하나님을 존경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옵니다. 사람은 자기가 믿는 것 같이 됩니다. …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처럼 기술있는 사람이 됩니다.”

또한 부해리 선교사는 ‘마아크(Mark)’라는 사냥개를 키웠는데, 전도를 나갈 때는 사냥개를 데리고 다니곤 했다. 우리 나라의 토종개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사냥개를 처음 본 구경꾼들이 모여들면 자신이 훈련시킨 개를 옆에 자랑삼아 앉혀두곤 모인 사람들에게 성경말씀을 들려주며 전도를 했다. 
 

또한 부해리 선교사는 대구 동산병원 초창기 때에 존슨(장인차) 의사의 병원 수술을 도와주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부해리 선교사는 존슨이 시키는 대로 환자를 마취하는 일을 했는데, 이는 존슨의 말을 알아듣는 간호사 또는 보조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당시 대구 선교기지에서는 나환자 구제사업을 위해 1917 ~18년 사이에 동산병원 인근에 나환자 요양소 부지를 확보하고 병동과 진료실, 예배당 건물을 지었다. 요양원 교회는 100여 명의 환자를 수용하고 있었는데, 당시 부해리 선교사는 이곳으로 가 함께 예배를 드리고, 성찬식을 거행하며 세례를 베풀었다. 그는 나환자들이 찬양하며, 설교를 듣는 모습을 통해 기쁨을 느끼며 감동을 느낀 기록을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다. 

 

“그들은(나환자들) 가끔 그들의 질병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들의 질병이 아니었더라면 구주를 알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 나는 그들을 지켜보면서 그들의 얼굴이 주님의 모습으로 거듭나는 순간을 상상해 보았다.”

송천교회의 창립 이후 1938년까지 당회장을 지낸 부해리 선교사는 일제의 진주만 침공 전 외국인 선교사 추방령으로 1941년 9월 19일 67세의 나이로 조선(한국)을 떠나 1944년 선교사직에서 은퇴하기까지 대구에서 그의 선교 사역의 대부분인 43년간을 헌신하였다. 그는 1959년 3월 26일 캘리포니아 산타크루즈 (Santa Cruz)에서 85세를 일기로 소천하였다.
 

부해리 선교사는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펼치는 과정에서 1900년 영천군 대창면에 조곡교회(助谷敎會)를 세운 이후 경북 서북부 지방(김천, 선산, 칠곡 등)과 대구에 수많은 교회를 세웠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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