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하설 선교사(왼쪽)와 평양 산정현교회의 옛 모습(오른쪽)

편하설 선교사는 1874년 9월 11일 미국 인디애나 주 컬버(Culver)에서 출생했다. 그는 1896년 하노버로(Hanover) 대학을 졸업하고 시카고의 맥코믹 신학교를 1900년 졸업한 후(M. Div) 그해 3월, 미북장로교회에서 한국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다.(마포삼열 선교사, 배위량 선교사, 그리고 편하설 선교사는 같은 고향, 같은 대학, 같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같이 조선(한국)으로 선교사로 와서 필자는 이들 세 사람을 하노버로 트리오(Hanover Trio)라 부르기로 하였다.)
미국 북장로교회 뉴 올바니(New Albany)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그가 한국을 향해 인디애나 주 제퍼슨빌의 자택에서 출발한 것이 1900년 하반기였다. 그는 고향을 떠나 시카고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하와이를 거쳐 일본 요코하마를 경유, 1900년 10월 16일 부산에 도착했다.


10월 18일 제물포에 도착하여 서울에 들어와 미국 공사관에 등록을 하고 선교부로부터 평양 선교지를 배정받고 이튿날인 19일에 다시 제물포로 내려가 배를 타고 진남포를 거쳐 평양에 입성하였다. 그는 26세의 미혼 총각으로 한국에 왔는데, 후에 들어와 평북지방에서 같이 선교 사역하였던 헬렌 컥우드(Helen Kirkwood)양과 1905년 12월 31일 약혼을 하고, 1907년 9월 20일 결혼 하였다. 그는 일생동안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방에서 활동하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후, 일제가 외국 선교사들을 추방할 때인 1942년,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감으로써 그의 42년간 선교활동도 끝나게 된다. 그의 42년간의 선교활동 대부분은 평양 산정현 교회와 평양 신학교 중심으로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긴 칼을 찬 정복 차림의 일본 경찰들은 싸늘한 눈초리로 한 사람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복경찰 수십 명이 현장을 에워싸고 덩달아 위협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러나 당사자인 65세 고령의 미국 선교사는 아랑곳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치기 시작했다.

“여기는 노회 석상입니다. 무슨 일이든 처리할 때는 교회법을 기준으로 처리해야 합니다. 정치 제1장 7조를 보십시오. 우리는 교인들의 양심을 구속하는 어떤 재판도 해서는 안 됩니다. 작년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도 수많은 총대들의 양심을 억누르고 결정한 것입니다.”

1939년 12월 19일 평양 남문외교회에서 열린 제37회 평양노회 임시회. 개회 벽두에 노회장 최지화는 이날 회의의 목적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평양노회 산하의 유일한 교회, 바로 산정현교회를 징계하기 위한 것임을 밝혔다.
각본을 짜놓은 듯 모든 절차가 일사분란하게 진행되었다. 일제의 막무가내식 신사참배 강요 정책 앞에 이미 총회나 평양노회는 무너져버린 상태였다. 산정현교회의 폐쇄와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치리는 사실상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현장의 삼엄함에 맞서 반기를 든 한 사람이 있었다. 미국북장로회로부터 파송돼 40년 가까이 한국에 머물고 있던 찰스 프랜시스 번하이젤(Charles F. Bernheisel), 한국 이름으로 편하설이라 불리는 선교사였다.

그는 이미 산정현교회 문제와 관련해 여러 차례 경찰에 불려가 조사와 경고를 받은 인물이었다. 경찰은 이 임시노회를 앞두고 노회에서 내리는 결정에 반대하지 말 것을 노골적으로 지시하며, 이에 불응할 경우에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인지 협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의 엄청난 위세조차 편하설 선교사의 소신을 주저앉힐 수는 없었다.
어쩌면 이게 한국에서 마지막 사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용감하게 시작된 편하설 선교사의 발언은 결국 끝을 맺지 못했다. '자리에 앉아!'라고 소리 지르던 경찰들이 기어이 그를 붙잡아 회의석상에 끌어내고는 경찰서로 연행해갔기 때문이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1906년 산정현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부터 그의 여정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3·1운동과 신사참배 반대운동 등 한국교회와 민족사가 만나는 역사의 순간마다 어김없이 산정현교회가 중심에 있었고, 그 곁에는 편하설 선교사가 항상 함께였다.

조국 독립을 외치며 만세시위를 지휘한 강규찬 목사, 일본의 우상 앞에 무릎 꿇을 수 없다며 끝까지 저항한 주기철 목사가 체포되어 강단을 비울 때면 아무도 대신하려 하지 않는 그 자리를 편하설 선교사가 자진하여 채웠다. 고난 앞에 중심을 잃고 흔들릴 뻔했던 교회는 키다리 아저씨처럼 든든하게 버텨주는 편하설 선교사를 중심으로 다시 결속할 수 있었다.
작은 당나귀를 타고 전도하러 다니는 소탈함과, 강단과 교탁에 서서 바른 신앙과 신학의 길을 준엄하게 설파하는 실력을 겸비한 이 열정의 선교사를 사람들은 몹시 좋아했다. 그런 이들을 외면하지 못하고, 수많은 위협을 감수해야했던 편하설 선교사의 안타까운 속내는 임시노회 사건이 있은 지 열흘 후 자신의 동료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 절절하게 드러나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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