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요셉 목사 3분 설교 메세지

❋ 주일 예배 설교(2020. 10. 11) ❋ - 김요셉 원천침례교회(수원) 목사 –


"진정한 제자도⑵: 순종함으로"

(마태복음 21장 1-11절)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 오늘 본문은 종려 주일(Palm Sunday)에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을 기록한 장면이다.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모습이지만, 좀 더 줌인(zoom in)하여 혹여 전에 인식하지 못한 영적 진리를 보길 원한다.
-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 한 주간을 예루살렘에 승리 입성하면서 시작하신다.
- 예수님은 아직 한 번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무리가 겉옷을 길에 펴고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면서 앞뒤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9절) 외치며 찬양하는 소리를 들으며 예루살렘에 승리 입성하신다.
- 오늘 본문 가운데 유독 한 구절, 곧 10절에 제 시선이 멈췄다.
(마 21: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 저는 10절에서도 특히 "이는 누구냐?" "Who is this?"(NIV) 하는 표현에 집중해서 보려고 한다.
-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까 성 안에 있던 많은 사람이 질문한다. "이는 누구냐?" 예수님은 어렸을 때부터 유월절을 지키려고 매년 예루살렘에 올라오셨으며, 공생애 기간에도 예루살렘에서 여러 가지 사역을 하셨는데 이번에 세 번째로 오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Who is this?"란 새삼스러운 질문을 받으셨을까?
-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까 온 성 안에 '소동'이 일어났다. 여기서 '소동'이란 헬라 단어는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흔들리다'는 뜻이 있다.
- 오늘 제가 사람들이 "이는 누구냐?"라고 한 질문에 집중해서 보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여태까지는 예수님이 여러 차례 예루살렘에 오셨어도 공개적으로 신분을 노출하는 것을 억제하셨다. 30년 간 무명의 존재로 나사렛에서 목수 요셉의 아들로, 그것도 어찌 보면 숨어 지내셨던 예수님이다. 공생애 3년 동안 예수님이 베푸시는 기적을 보고 무리가 몰려와서 강제로 등극시켜 왕으로 삼으려 했을 때도 극구 피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셨다.
- 그런데 이제 이 땅에서 마지막 한 주간을 남겨두고, 30년 동안 조용히 계셨고 공생애 3년 사역을 조용히 해 오시던 예수께서 왜 예루살렘 성에 소동이 일어날 정도로 공개적인 행보를 하셨을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목적 완성의 클라이맥스가 예루살렘 승리 입성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 예수님의 예루살렘 승리 입성은 당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의 완성, 곧 불순종의 죄악에 물려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에게 구원의 놋뱀이 되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고 십자가에 들리시는 과정의 시작이었다.
-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외침의 질문이 유효하다. "Who is this Man, Jesus?" "이 예수는 누구신가?"
- 이 질문은 우리의 영혼을 파고드는 질문이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제각기 다를 것이다. 이 질문에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내 영혼의 미래가 달라질 것이다.
- 당시 예루살렘에서 이 질문을 받은 사람마다 마음속으로 제각기 다른 대답을 했을 것이다. "Who is this?"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각각 쓰고 있던 색안경에 따라 달랐을 것이다.


1. 로마인: 권력의 안경 → 경계와 조롱

- 첫째는 '로마인'으로 그들은 '권력의 안경'을 쓰고 '경계와 조롱'을 일삼았다. 그들은 속국인 이스라엘에 와 있던 로마 군인과 총독 빌라도 등 로마 사람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힘이 보였다.
- 이스라엘의 역사 기록을 보면, 로마 속국이던 예루살렘은 평소 약 20만 명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유대교 최대 명절인 유월절이 되면, 1주일 전부터 예루살렘의 인구는 2백만 명으로 10배가 늘어났다.
- 예루살렘은 로마의 속국이었지만 로마가 다른 주변국과 달리 평소에는 대제사장과 70인의 산헤드린에게 위탁했다. 유대인이 유일신을 믿고 안식일을 지키는 아주 독특하고 고지식한 종교성 때문이었다.
- 그러나 유대인의 큰 명절인 유월절이 되면 급작스럽게 인구가 불어나는 것을 감안해 평소에는 지중해 연안의 가이사랴에 있던 로마 총독 빌라도와 군인들이 예루살렘에 임시로 들어와 치안을 담당했다.
- 이스라엘을 군사적 정치적으로 점령하고 있던 로마 군인들은 매우 긴장하는 태세를 갖추고 예수님의 승리 입성을 바라보며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 지배 계층이던 로마인은 색안경을 쓰고 승리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로마의 문화 코드는 Pax Romana(로마의 평화), 곧 로마가 지배하는 권력의 안정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틀림없이 행여 데모가 일어날까 하여 큰 소리를 외치며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무리를 매우 긴장하며 '경계'하고 있었을 것이다.
- 그들의 가치관 곧 그들이 쓰고 있는 안경은 Power(힘과 권력)였다. 그리고 Power로 살고 Power로 죽는 문화 속에서 그들은 항상 Power는 과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존 논리로 생활해 왔다.
- 로마에서 Power를 과시하는 화려한 개선식을 보아 왔던 로마인, 특히 로마 군인에게 갈릴리에서 내려온 목수의 아들 예수가 한 번도 사람을 태운 적이 없는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무리와 함께 입성하는 모습을 '조롱'이 가득찬 눈으로 보았을 것이다. 전혀 위협을 느낄 상황이 되지 않아서 서로 키득거리며 손가락질하고 '조롱'으로 일관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승리 입성을 바라보던 그들이 '경계'와 더불어 '조롱'의 마음으로 일관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 그러나 '권력의 안경'을 쓰고 있던 로마인이 결코 보지 못하고 놓쳐 버린 아주 중대한 진리가 있었다.
(마 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 이 고난 주간에 겸손한 나귀,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타고 로마 시대의 가장 부끄럽고 죄악스런 처형 방식인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이 분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다. 예수님이 진정한 개선식 행렬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것이다.
-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로마 군인의 눈에는 익숙지 않은 왕의 모습이었다.
- 자신이 쓰고 있는 색안경으로 인해 그들은 왕 되신 메시아를 보지 못했다. 그들은 결국 자신의 '조롱'이 부메랑으로 돌아와 그들 자신이 최후의 조롱거리가 될 것을 보지 못했다.
- "Who is this?" 그분은 누구신가? 과연 나의 왕이신가? 우리의 왕이신가? 입으로만 부르는 왕이 아니라 내 삶을 정말로 겸손으로 지배하시는 메시아로 인정할 수 있는가?


2. 유대인: 종교의 안경 → 기대와 실망

- 둘째는 '유대인'으로 그들은 '종교의 안경'을 쓰고 '기대와 실망'을 나타냈다.
- 종교 지도자와 유대인들이 수천 년 동안 반복해 온 유월절 절기는 민족 최대의 명절이자 가장 중요한 종교 의식을 행하는 주간이었다. 우리가 종려 주일로 기념하는 그 주의 첫날 예루살렘에서는 모든 유대인이 'Lamb Selection Day' 곧 희생양을 고르는 행사로 기념하였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죄를 대속할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한 마리를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 그런데 세상 죄를 지고 오신 어린 양 예수를 보면서 그들도 반문했다. "Who is this Man, Jesus?"
- 그들은 '종교의 안경'을 쓰고 영혼의 죄악을 씻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자신의 생각대로 그려낸 현세적인 메시아로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잔뜩 '기대'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등장했을 때, 자기 겉옷을 벗어 땅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호산나"를 외치고 예수님을 환영했다.
- 그들은 왜 예수님 앞에 "호산나"를 외쳤을까? 그들은 Genie 같은 메시아를 원했다. 억울한 속국의 신분을 벗겨 줄 정치적인 메시아, 가난과 질병을 퇴치해 줄 물질적인 메시아, 종교적 안정을 유지하고 자기 관습을 흔들리지 않게 해 줄 현세적인 메시아를 원했다.
- 결국 그들은 '종교의 안경'을 쓰고 예수님을 보면서 매우 제한적인 메시아로만 보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Who is this?" "이 사람은 누구냐?"는 질문을 했던 것이다.
(마 21: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 오늘 본문의 유대인은 "호산나, 호산나"를 환호하면서 자기 겉옷을 길에 깔았다. 사실 겉옷이 한 벌밖에 없는 사람인데도 그 겉옷을 깔았다. 예수님이 탄 나귀가 진흙을 밟지 말라고 가장 소중한 것을 길에 깔았던 그들의 현세적 메시아에 대한 '기대'였다. 그러나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호감은 종교적 색안경으로 인해 예수님을 선지자 정도로는 인정해 줄 수 있는 눈에 불과했다.
- 그래서 그 사람들은 불과 며칠 만에 '기대'하며 환호한 호산나의 외침이 '실망'으로 변해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외침으로 바뀌는 변덕스런 존재가 되어 버렸다.
- 우리가 '종교의 안경'을 쓰고 관습적이고 현세적인 기복주의적인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이 분이 누구신가?"는 질문을 할 때, 우리에게는 '기대'와 더불어 '실망'이 병행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3. 예수님: 사랑의 안경 → 순종과 희생

- 그렇다면 "이 사람은 누구냐?"는 질문에 우리는 어떤 안경을 쓰고 예수님을 보아야 할까?
- 저는 오늘 본문 말씀 속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안경, 예수께서 스스로 쓰신 거울 같은 안경, 그리고 제자들이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받았던 그 안경을 여러분에게 소개하려고 한다.
- 그것은 '권력의 안경'도 '종교의 안경'도 아니라, '사랑의 안경' 곧 '아가페 안경'이다.
- 셋째는 '예수님'의 안경인데, 그분은 '사랑의 안경'을 쓰고 '순종과 실망'을 보여 주셨다.
- 예수님은 종려 주일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시하신 구약의 예언을 '순종'하기 위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그분은 입성 전에 아버지와 긴 시간을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면서 '순종'의 잔, 십자가의 죽음을 아시면서 겸손의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이다.
- '사랑의 안경'을 쓰고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눈에는 어떤 모습이 보였을까? 그런 예수님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순종'의 잔을 드신 예수님이 '사랑의 안경'으로 보신 모습은 십자가였을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이 눈앞에 있음을 보시면서도, 이 길을 가지 않으면 죽지 않을 텐데 하시면서도, '사랑의 안경'을 쓰신 예수님은 '순종'하기 위해 나귀를 타고 구원을 향한 발걸음을 옮기신 것이다. 그런 예수님의 겸손의 모습을 보고 무리는 호산나를 외쳤지만,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다(눅 19:41).
- 로마인과 로마 군인의 안경이 '경계와 조롱'의 안경이고 종교 지도자와 유대인의 안경이 '기대와 실망'의 안경이었다면, 우리 예수님이 끼셨던 사랑의 아가페 안경은 '순종과 희생'의 안경이었다.
(히 5:8-9)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 예수님의 '사랑의 안경, 아가페의 안경'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순종'을 초래했다. 제자들도 사랑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고 나귀를 가져오라는 말씀을 '순종'했다.
- 우리도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나귀를 풀어 끌고 오는 '순종'을 해야 하겠다.
- 그리고 예수님은 '사랑의 안경'을 쓰시고 '희생'의 모습을 보여 주셨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우리를 위해 '사랑의 안경'을 쓰셨던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고 나서 십자가까지 가셔서 승리를 완성하는 '희생'을 끝까지 이루셨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그 어린 양은 바로 죄인 되었을 때에 나와 나의 죄를 위해 '희생' 되신,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증해 주시는 예수님의 '희생'하는 사랑이며 사랑하는 '희생'이었다.
- 과연 나는 어떤 안경으로 예수님을 보는가? 이해되지 않는 조롱의 마음으로 보는 '권력의 안경'인가? 내 뜻과 관습 때문에 '실망'의 마음으로 보는 '종교의 안경'인가? 나는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의 안경'을 함께 끼고 '순종과 희생'의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 승리 입성하신 예수님의 궁극적인 승리가 내 죄를 씻어 주는 승리일 뿐만이 아니라, 나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르며 내 삶도 예수님처럼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는 승리의 삶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설교요약/정리: 안재환 (원천침례교회 집사, 흥사단 부이사장)
▸영문자막 번역/정리: 노승빈 (크리스찬타임스 한국후원회 회장, 백석대 교수)
정두준 (크리스찬타임스 한국후원회 영문서기)
Eli Lee (크리스찬타임스 한국후원회, Deloitte 리스크자문본부)
▸영상편집: 강한빛 (크리스찬타임스 한국후원회 영상편집팀장, 오롯영상프로덕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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