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요셉 목사 3분 설교 메세지

❋ 주일 예배 설교(2020. 10. 18) ❋

- 김요셉 원천침례교회(수원) 목사 -


"진정한 제자도⑶: 열매 맺음으로"


(마태복음 21장 12-22절)
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14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16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17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18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0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 오늘은 '열매 맺음으로'라는 제목으로 예수님이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사건과 열매 맺지 않은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신 사건을 통해 '진정한 제자도'에 대한 예수님의 세 번째 가르침을 함께 보려고 한다.
- 오늘 본문의 두 사건, 곧 매매하는 사람을 내쫓고 돈 바꾸는 사람의 상을 뒤엎으며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사건과 열매 없이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마르도록 저주하신 사건은 전혀 연관이 없는 듯하다.
- 그런데 더 아리송한 것은 무화과나무가 말라죽은 것을 보고 이상히 여긴 제자들이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20절) 하는 질문에, 예수님은 느닷없이 "기도 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22절) 하고 동문서답 같은 말씀을 하신다.
- 오늘 본문은 마태가 함축적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자칫 예수님의 언행을 오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전혀 연관성 없는 사건을 나열해 놓은 것처럼 보이고, 동문서답 같은 말씀을 하시기 때문이다.
- 그렇지만 오늘 말씀을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해 보면서, 두 사건은 매우 깊은 연관이 있으며 예수님의 행위와 말씀은 의도성이 짙은 것이라는 사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1. 매매로 더럽혀진 성전의 청결(12-16절)

-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인물의 대표적인 역할 세 가지는 왕(King), 제사장(Priest), 선지자(Prophet)다. 특히 마태는 오늘 본문에서 매매하는 성전을 청결케 하시는 사건을 통해 승리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선지자적인 역할, 곧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시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 예수님은 공생애 세 번째인 마지막 유월절에 매매하는 성전의 모습을 보시고 왜 불같은 화를 내시면서 성전을 청결케 하시는 것일까?
- 구약 시대의 영성은 절기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제사를 드리는 것이 중심인 영성이었다. 이스라엘 사람은 유대교의 대표적인 3대 절기(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때마다 전국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제물을 준비하여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며 예배를 드렸다.
- 그런데 예수님 당시 유대인은 포로로 살았던 과거 경력으로 인해 디아스포라가 되어 여러 나라에서 절기 예배를 드리러 오게 되었다.
- 그래서 제사가 중심인 구약 시대 예배에서 제사 드릴 양이나 비둘기를 먼 지방에서 갖고 오는 번거로움을 덜어 주려고 성전 뜰에서 제사용 짐승 매매가 이뤄졌다.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오는 관계로 화폐 단위가 다르니 성전 안에서 환전하여 바로 제사할 제물을 구입하고 제대로 예배드릴 수 있는 필요가 커졌다.
- 종교인들 가운데 이런 필요를 채우기 위해 동전 교환소를 만들고 10배나 늘어난 참배객의 편의를 봐 주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 역할이 단순히 편의를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필요를 채우고 이익을 챙기는 소비자적인 행태로 전락하고 말았다.
- 예배드리러 오는 사람도 소비자적인 마인드로 종교적인 소비자(Religious Consumer)가 되었고, 그곳에서 비둘기를 팔고 동전을 교환해 주는 사람과 예배를 인도하거나 주관하는 유대인조차도인 소비자적인 마인드의 영성을 탐미하게 되어 성전을 가장 활발한 장터로 전락시키고 만 것이다.
- 그런데 현대 교회는 어떤가? 예수께서 오늘 우리 교회에 오시면, 우리에게서 자신의 필요 충족에만 관심이 있는 소비자적인 영성을 발견하지 않으실까?
- 종교적인 소비자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진다. 자신의 필요 충족이 참여의 중심이 된다. 내가 은혜 받아야 하고, 내 아이들이 좋아해야 하며, 내가 선택할 활동이나 그룹은 득실을 따진 다음에 결정한다. 심지어 십일조 헌금을 하지만, 투자적인 동기 곧 십일조 헌금을 하면 내가 축복받는다는 생각으로 헌금한다.
-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공간 곧 '내 아버지 집'은 종교적인 소비자가 모이는 곳이 아니라, 영적인 생산자(Spiritual Producer)인 열매 맺는 사람 곧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스스로 깨닫고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헌신과 희생을 통해서 자신보다는 하나님과 이웃에게 이익을 제공하고 영적인 열매를 맺는 인생을 사는 사람의 모임을 찾으셨던 것이다.
- 기도는 이런 의미로 열매 맺는 영성의 핵심이 된다.


2.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저주(17-19절)

- 예수님이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예배드리러 가서 자신이 유월절 어린 양이 되어 십자가 제물로 드려지는 가장 중요한 고난 주간에 성전에서 꼭 찾고 싶었던 것은 열매 맺을 줄 아는 영적인 동지들이었다.
-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이 기대하시는 영적인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가길 원하신다.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는 잘라내시고, 열매 맺는 가지는 더 많이 맺도록 손질하신다(요 15:2).
- 하나님은 우리 삶에서 영적인 가지치기를 해 주신다. 열매 맺을 수 있지만 여러 가지 일로 분산된 생각을 하고 에너지가 여러 군데로 갈라지더라도 우리가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면, 열매 맺을 수 있도록 분산된 생각을 잘라 주시고 갈라지는 에너지를 모아 주신다. 하지만 말씀을 떠나 살게 되어 열매 맺을 수 없게 된다면, 아예 열매 맺을 수 없는 가지로 보시고 잘라 내신다. 아예 생명이 없는 것으로 보시고 버리신다.
- 예수님의 성전 청결과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의 저주는 생각보다 매우 관계가 깊은 사건이다.
-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두 사건을 좀 더 실제 시간의 흐름에 맞게 기록하고(막 11:12-14) 있는 마가복음과 같이 보아야 사건의 전말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 마가복음 11장은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13절), 오늘 본문은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19절)라고 묘사하고 있다.
- 마가복음에는 마태복음에 나오지 않는 디테일을 발견할 수 있는데, 유심히 읽어보면 오히려 더 헷갈린다.
- 무화과나무와 열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본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 류모세 선교사(현재 목사)가 쓴 열린다 성경 - 성경의 비밀을 푸는 식물 이야기에 소개된 자료를 토대로 무화과나무의 특성과 의미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 지중해와 접한 중동 지방인 이스라엘의 독특한 기후에서 무화과나무는 유월절이 있는 4월부터 초막절이 있는 10월까지 모두 다섯 번 열매를 맺는다. 6개월의 우기 동안 앙상한 가지로 겨울을 보낸 무화과나무는 유월절이 다가오면서 조그만 잎사귀와 함께 '파게'라는 작은 무화과 첫 열매를 맺으면서 긴 여름 동안 무화과 열매를 모두 다섯 차례 맺는다.
- 유월절 즈음에 맺히는 첫 열매인 무화과(하과)는 히브리어로 '파게'라 하고, 이후에 순차적으로 열리는 무화과(추과)는 '테에나'라 한다. 무화과를 뜻하는 영어 'Fig'도 히브리어 '파게(page)'에서 온 단어다.
- 히브리어에는 첫 열매인 무화과와 이후 열리는 무화과를 뜻하는 단어가 '파게'와 '테에나'로 서로 다르지만, 헬라어나 영어나 한국어에는 모두 '무화과'라는 한 단어로 번역되어 있다. 그래서 오늘 본문과 같이 이름이 다른 두 무화과를 구별하지 않는 말씀을 읽으면 전혀 다른 해석을 하게 되거나 이해하기 어렵다.
- 유월절 즈음에 맺히는 '파게'는 작은 잎과 함께 맺히는 작은 열매다. 이후 커다란 잎과 함께 맺히는 '테에나'에 비해 작고 당도가 떨어진다. 파게는 무화과 과수원의 주인 처지에서 보면 상품성이 떨어지므로 일일이 따 주어야 한다. 그래서 주인은 자기가 일일이 파게를 따는 수고를 하는 대신에 지나가는 행인들이 파게를 공짜로 따 먹도록 허락했다.
- 이튿날 예수께서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 시장하셨다. 멀리서 잎사귀 있는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열매(파게)가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예수께서 파게를 찾은 것은 때가 유월절 즈음인지라 아직 본격적인 무화과(테에나)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월절 즈음에 잎사귀와 동시에 맺혀야 할 파게를 맺지 못하고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예수님은 저주하셨다.
- 이것이 왜 중요한가?
- 유월절 즈음에 계절적으로 또 나무의 특성상 잎사귀가 무성하면 '파게'도 반드시 열려야 하는 무화과나무였다. 그래서 예수님이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파게'가 열려 있을 것으로 기대하셨다.
- 잎사귀가 무성하다는 것은 열매가 있다는 상징이다. 열매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 잎사귀다. 그런데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열매 맺을 만한 나무라면 반드시 '파게'가 열려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는 나무는 후에도 '테에나'를 맺을 수 없다.
- 유대인과 종교 지도자들은 승리 입성하신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이른 무화과 열매처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성으로 열매 맺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들은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그런 영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 참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그들은 열매 맺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 열매가 기대되는 곳의 열매 없는 삶은 예수님이 저주하기 전에 벌써 저주 받은 인생이다. 예수님의 저주는 매정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영적인 귀결이다. 우리 인생이 소비자적인 영성으로만 점철된다면, 결국 우리는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삶 곧 저주 받는 삶이 되고 말 것이다.
- 하나님은 창세 곧 세상을 창조하신 그때부터 하나님을 알 만한 모든 것을 자연 속에서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환히 드러내고 알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나님으로 영광스럽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쓸모없고 어리석은 마음으로 자기 생각대로 살아간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 없이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신다. 이것이 저주 받는 삶의 모습이다.
- 하나님은 우리가 열매 맺기를 기대하신다. 우리의 삶은 그분에게 심판 받는 삶이다.


3. 열매 맺음으로 기도하는 제자도(20-22절)

- 무화과나무가 말라죽은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긴 제자들이 "어떻게 무화과나무가 갑자기 말라 버렸습니까?"(20절) 하는 질문에, 예수님은 "기도할 때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을 것이다"(22절) 하고 동문서답 같은 말씀을 하신다.
- 소비자적인 영성(성전에서 하는 매매 행위, 12절)을 생산하는 영성(기도하는 집, 13절)으로 바꾸시려는 예수님은 성전 청결 사역과 요란하고 좋아 보이는 것 같지만 텅 빈 영성의 잎사귀 무성한 무화과나무 사건을 깊숙이 연관지어면서, 온전한 영성 회복의 중심에는 오직 기도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 성전에서 매매하는 사람을 내쫓고 돈 바꾸는 사람의 상을 뒤엎으신 것도 '기도하는 집'으로 바꾸시려는 것이고, 열매 없이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도 제자들에게 '기도하라'는 것이다.
- 온전한 영성의 회복, 경건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에는 기도가 중심이다. 왜 그런가?
- 승리 입성하신 마지막 한 주간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시고 싶었던 마지막 말씀의 중심은 여기에 있다.
- 고난 주간(Passion Week)에 제자들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던 예수께서 종교 지도자들과 제자들의 죄를 모두 짊어지시고 저주의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체험한다. 성전 청결(소비자적 영성의 타파)과 열매 맺지 못하는 인생의 저주를 동시에 해결하신 예수님의 죽으심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 붙어 있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제공하신 것이다.
- 내가 의존하는 것은 내 노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이다. 내가 기도할 수 있는 것은 내 기도 능력이 아니라 그 기도를 받으시는 예수님의 능력이 크시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통해 죽음을 이기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 안에 붙어 있으면 저주의 삶이 다시 열매 맺는 삶이 되는 줄 믿기를 바란다.
- 저주의 나무에 매달리신 예수님께 기도로 매달리는 영성의 회복이 오늘 메시지의 중심이다.


▸설교요약/정리: 안재환 (원천침례교회 집사, 흥사단 부이사장)
▸영문자막 번역/정리: 노승빈 (크리스찬타임스 한국후원회 회장, 백석대 교수)
정두준 (크리스찬타임스 한국후원회 영문서기)
Eli Lee (크리스찬타임스 한국후원회, Deloitte 리스크자문본부)
▸영상편집: 강한빛 (크리스찬타임스 한국후원회 영상편집팀장, 오롯영상프로덕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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