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혹독한 어머니의 가르침과 불교의 가정에서 자라셨는데 어머니 이야기를 해주세요.


저는 6형제 중 셋째로 부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저희 집은 할아버지 때부터 아버님까지 한의원을 하셨는데 매일 열 개가 넘는 약탕기에 각기 다른 약을 달이는 일을 초등학교 2학년인 저에게 시키셨습니다. 바로 2살 위에 오빠가 계셨는데 유교적인 생각과 불교적인 사상 때문에 아들을 아주 특별하게 생각하셔서 오빠에게는 일을 안 시키셨습니다. 제게는 약탕기 앞에서 부채질 하고 물 조절 하는 것이 굉장히 힘든 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큰 언니도 안 시키시고 왜그런지 저에게만 일을 시키셨습니다. 오후 5시부터 약을 달이기 시작하면 8시 정도 되서야 끝이 났는데 겨울에는 밖에서 약을 달이는 일이 너무나 추웠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한의원 운영하시는 것만으로는 생활이 안 되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큰 슈퍼마켓에서 일하셨는데 그 일도 초등학교 때 일일이 제가 도와드렸습니다. 저는 어릴 적 키도 작고 체구가 아주 왜소했는데 어두운 밤, 물건을 산더미처럼 리어카에 싣고 비포장 도로 위를 끌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은 굉장히 추운 밤이었는데 오르막길에 리어커를 끌던 저는 무거운 리어카를 못 이겨 몸이 공중으로 부웅 뜨며 논두렁에 처박혀 팔뼈에 금이 가고 휘기도 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던 어느 날, 어떤 중이 지나가다 저를 보고는 “우리나라에서 몇째 가는 비구니 승이 될 것이다.”라는 말 한마디에 어머니는 저를 바로 불교 중학교로 전학을 보냈습니다. 불교 중학교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책상 위에 올라가서 가부좌를 틀고, '참선'을 시키는데 저는 참선이 되지 않았습니다. 또 학생들이 한복을 입고 절에 가서 탑돌이를 하면서 찬불가를 불러야 하는데 저는 찬불가가 불러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상을 타서 어머니께 보여드리면 오빠는 상을 못타오는데 여자인 제가 상을 탔다고 때리기까지 했습니다. 제가 보는 앞에서 상장을 열십자로 찢어 공중에 날리셨습니다. 맞은 것도 서러운데 상장은 다 찢어져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속으로 막연히 알 수 없는 슬픔이 계속 밀려 왔습니다.
'난 언제 어머니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될까?'라는 생각에 너무 슬펐습니다.


옛날엔 2월이 되면 그 해의 모든 액운을 날리는 '바람을 올리는 날'이 있었습니다. 장독대에 부모가 화선지, 창호지에다가 각 자녀에 대한 소원을 빌었는데 정화수 한 그릇 떠 놓고, 쑥떡을 해서 소원이 적힌 종이를 촛불에 태워 날려 보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오빠 것을 먼저 하는데 먼저 하다가 중간에 종이가 올라가다가 떨어지자 저는 불안해졌습니다. 제 차례가 되었는데 제 것은 끝없이 올라가자 그때부터 어머니는 저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쑥떡, 인절미를 너무너무 좋아하고 1년 동안 기다렸는데 먹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결국 동생과 오빠의 숙제를 해주고서야 밤에 떡 한 개를 얻어먹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묘한 수단과 나만의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갖고 싶은 것이 있는데 못 가지면 저녁에 '저걸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을까?'를 연구했습니다. 그 뒤부터는 오빠 숙제를 대신 해주며 필요한 것을 얻었습니다. 숙제를 해주다 보니 제가 오빠보다 공부 수준이 더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고등학교를 시험쳐서 들어갔습니다. 저는 시험에 합격을 했는데도 어머니는 저만 '교복을 못 해준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에 찾아가서 그 학교를 졸업한 선배의 교복을 얻어서 입었습니다. 훗날 아이를 낳고 생각해보니까 어머니에게 너무 감사했습니다. 눈물 날 정도로요. 제가 그렇게 혹독하게 훈련이 안 되었으면 어른이 돼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그 당시 제 나이에 할 수 없는 일들을 시키셨습니다. 저는 도망도 안 가고 어떻게든 했습니다. 엄청난 훈련으로 수 십 가지 일들을 짧은 시간 내에 하는 법을 터득했습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이 '그 일을 언제 해보셨어요?'하고 물으면 '한 58년 전에요.'라고 답할 만큼 저는 벌써 그 일을 어렸을 적에 해보았습니다. 살아가야 했기 때문에, 생존해야 하니까.

어머니가 일흔정도 되셨던 어느 날, 저를 보시면서 '미안하다, 너 밖에 없었다.'라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아버지는 '널 조금이라도 뒷바라지를 했어야 했는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저를 독립적으로 만들어주시고 강하게 만들어주신 어머니가 고맙습니다.

권사님께서 사업을 크게 하셨다고 하셨는데 어떤 사업을 하셨나요?


저는 어린 시절부터 어떻게 해야 돈을 많이 벌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업을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대를 졸업하고 나서 일단 미술 입시학원을 시작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예수님을 안 믿을 때였어요.
부산에 3~4명 정도 있는 입시미술학원을 권리금을 주고 산 후 열심히 운영해서 50명 넘게 만들었습니다. 그 때가, 1980년도였는데 대학 입시반을 운영하면서 학원이 너무 잘 돼서 학원을 확장해서 열 개도 넘게 운영했습니다. 일하느라 매일 집에 새벽 2~4시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매출을 아무리 올려도 1년에 10억 이상은 못 올려서 저는 돈을 더 많이 버는 사업을 하기 위해서 학원을 한 번에 다 팔았습니다. 싹 다 파니까 돈이 꽤 됐습니다. 일 년에 2백 억 정도는 벌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동차 부품회사를 시작했는데 그 사업이 또 적중했습니다. 얼마 후 정확하게 200억 매출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자동차 회사가 아산 쪽으로 사업장을 다 옮긴다고 하더라고요. 부품회사도 부산에서 아산으로 함께 다 옮겨야 한다고 해서 고민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못 간다고 하다가 사업 시작 2년 만에 부도가 났습니다. 그때는 한 명 한 명 합의를 하지 않으면 구속이 되는 시대였어요. 그 수습하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것을 다 팔아서 수습하고 나니 아들 둘과 함께 살 아파트 전세 딱 1천만 원만 남았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죠. '내가 2백 억 올리는 사업을 해냈으니까, 이번에는 천 억 넘는 사업을 해야겠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케미칼 사업이었는데 저는 목숨을 걸고 열심히 했습니다.


제가 만든 제품을 사 줄 일본 바이어들을 접대할 때는 폭탄주를 만들어서 40잔씩 마셨습니다. 그리고 계약을 따냈습니다. 결국 케미컬 사업으로 6개월 만에 매출 목표 달성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렇게 천 억대 매출을 올리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에서 사업을 하면서 다른 거대한 회사들이 무서운 줄을 몰랐어요. 그들이 무섭다는 것을 알게된 행정재판을 3년을 했습니다. 대법원에서 3년 재판 끝에 무혐의를 받았습니다. 그 때 주머니에는 천 원 짜리 하나 없는데도 분하다는 생각보다는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겠다. 돈을 더 많이 벌어야겠다, 이번엔 2천 억대'라는 교만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당시 하나님을 믿지 않을땐데 저희 집하고 교회가 딱 붙어 있었는데도, 목사님께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하면 목사님께서 '어~'하면서 인사만 받아주시고 정작 저에게 한 번도 교회 오란 얘기를 안 하셨습니다. 제가 사업할 적에 내 주위에 아무도 교회가잔 말을 안 했고 지금 함께 사역하는 동생(미엘 전도사)만 저를 품었습니다. 동생은 온누리 교회에 가서 저를 위해서 열심히 중보기도를 했답니다.


근데 그렇게 이루 말할 수 없는 힘든 상황에서도 저는 얼마나 뺀들거렸느냐 하면, “그래, 종교의 자유가 있다. 너는 교회 잘 다녀라. 하나님 계신 거 알아.”라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이 계신 게 안 믿어졌습니다.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으니까 이제 진짜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사업할 때 캐딜락을 워낙 좋아해서 9대를 샀었습니다. 이사진들이 그 캐딜락을 몰고 다니고 부장급들은 리무진을 타고 다녔는데, 제가 재판하는 동안 차를 가지고 모두 도망가 버렸습니다. 나중에서야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하나님 없어도 나 이렇게 잘 살아요.'라는 생각으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저를 구원하시려고 저를 깨닫게 하시려고 하신 거였습니다.

저는 어떻게 죽을지 죽는 방법에 대해서 계속 생각했습니다. '쉽고 편하게 죽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약 먹고 호텔 이런데서 죽으면 세상이 난리가 날 것이고, 집 안에서 죽으면 아이들이 너무 놀랄 것 같고' 그래서 계룡산 자살바위에 서서 떨어져 죽기로 결심했습니다. 거기서 떨어지면 쉽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죽으러 간 그 때가 11월인데, 밤에 떨어져 죽으려니까 무서워서 '내일 아침에 와서 죽어야지.'하고 산 밑 민박집에 묵었습니다. 아무 생각도, 아이들 생각도 나지 않더라고요. 이른 아침에 사람이 없을 때에 죽어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아침이 되니까 신기하게 배가 고프더라고요. 아침 밥은 먹고 죽어야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민박집에서 산채 비빔밥을 팔아서 몇 시에 밥이 되냐고 하니까 11시에 된대요. 그래서 '아, 산채 비빔밥을 한 그릇 먹고 죽어야지' 생각했습니다. 밥을 기다리면서 생각했습니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몸에 신분증 하나만 챙겨서 '떨어져 죽으러 가야겠다.'라고 생각을 하는 도중에 민박집에서 10시 30분에 밥이 됐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 '11시에 밥을 주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묘하더라고요, 30분 일찍 부른게 마치 내가 사형장에 가는 것 마냥 30분만 늦게 부르지 생각했습니다.

산채 비빔밥을 겨우 모서리만 비벼서 첫 술을 뜨는 데 넘어가지고 않아 켁켁 거렸습니다. 얼른 먹고 죽으러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에 아주머니께 소주 한 병을 시키고 잔에 가득 담아서 원샷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비빔밥을 딱 먹으니까, 저의 숨어있는 생각. 그게 딱 떠오르더라고요. 두 잔을 마시고 나니까 '죽어서 해결될 일이 뭘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차라리 돌아가야겠다는 생각과 아이들 생각, 뭘 수습해야 할지 일의 가닥들이 잡혔습니다. 그래서 얼른 계산하고 버스를 타고 돌아 왔습니다. 그때부터 일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모든 일을 다 막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두바이는 기름 하나 안 나는 나라지만 세계 석유 자유시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동생과 함께 두바이로 갔습니다. 저는 두바이. 오만 최고의 석유 거래상들과 알고 지냈는데
그들이 우리를 칠성급 호텔에 묵게 했습니다. 그때 1인 식사비가 우리나라 돈으로 150만 원이었어요. 그걸 다 대접받았어요. 근데 그 사람들은 실컷 대접하고도 거절할 때는 끝이에요. 오만의 총리까지 미팅했고 금방 100억은 쉽게 올릴 거라 생각했는데 일이 진전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동생이 '언니,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봐! 이제 모두 중단하자.'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비로소 저는 모든 사업을 그만두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살아갈 수 있는 재정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저는 점점 말라가고 계속 쓰러졌습니다. 밥은 안 들어가고, 돈이 그렇게 많다가 없으니 사람이 못 살겠는 거예요. 동생이 '언니! 당분간 내가 직장에서 월급을 받는 것이 있으니까 우리 이것으로 함께 살아가자' 고 해서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동생은 회사 점심시간 때마다 제가 죽었나?, 살았나? 확인하러 집에 들렀습니다. 그때 저는 사는 것이 너무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동생은 아침에 회사 출근할 때마다 목사님 설교를 노트북에 틀어놓고 갔습니다. 그런데 저는 문 닫는 소리가 들리면 바로 꺼버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똑같이 틀어놓고 갔는데 끌려고 해도 꺼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개 들 힘도 없이 창틀에 머리를 기대서 듣는 데, 어느 순간 저는 정자세로 설교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의 십자가 확증이 딱 되면서 제 앞에 주님이 손을 내미시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계속 손을 내밀고 계시니 얼른 손을 잡아야겠다.'라는 생각에 저는 빠르게 그 손을 잡았는데 온몸을 지지듯 그 손이 얼마나 뜨겁던지. 저는 울면서 방안에서 펄쩍 펄쩍 뛰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성경책을 펴놓고 저도 모르게 찬송가를 계속 부르고 있었습니다. 동생이 퇴근 후에 집에 와서 '언니, 무슨 일이야?'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나 지금 너무 기뻐.' '성령님이 이렇게, 예수님이 이렇게 나를 업고 다니셔!'라고 제가 경험한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지난날이 다 회개가 되는데 회개할 것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잘했다, 잘했다 칭찬받은 일들이 전부 다 회개거리였습니다. 저는 하루 종일 찬송을 부르고, 계속 회개하면서 '하나님 아버지, 정말 저는 그동안 몰라서 그랬어요. 제가 잘한 건 줄 알았어요. 이렇게 교만한 줄 몰랐어요. 제가 너무 더럽게 느껴져서 죽겠어요.' 그렇게 고백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때 저는 하도 울어서 눈물이 떨어질 때 눈동자도 같이 떨어진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영접한지가 이제 14년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어떻게 해서 만들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그 후 매일 집에서 울면서 기도하며 지내다가 한 번은 동생과 함께 산을 가게 되었습니다. 산 중턱에 앉으니까 앞에 멋진 집도 보이고, 맛있는 음식도 생각나고.. 갑자기 둘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훌쩍훌쩍 울었습니다. 울다가 옆을 보니까 썩은 소나무가 있는데 그 안에 무언가가 보였습니다. 그걸 주워서 톡톡 두드려 봤어요. 동생이 썩은 나무로 뭐 하고 있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이걸 보니까 이 안에 주님이 보여.'하고 대답하니까 동생이 이 나무를 집에 가져가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밥을 싸가고 간 보자기에 나무를 담아 집에 가져와서 커터칼로 하루종일 다듬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보면 이건 그냥 썩은 나무 하나일 뿐인데 이 속에 반드시 주님이 계실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조그만 십자가 하나 살 돈도 없어서 십자가를 만들어서 집에서 '주여.' 하면서 기도도 해보고 싶었습니다.

주님을 늦게 영접하니까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습니다. 열렬히 기도하고 싶은 데 내 눈에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무엇을 보면서 기도해야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며 나무를 깍아 십자가를 만드니까 주님의 활짝 웃는 모습이 마음을 통해서 보였습니다.

간솔은 나무의 기름 덩어리에요. 소나무 같이 기름이 있는 나무는 죽을 적에 흩어진 기름을 하나로 모아요. 목생은 자기가 언제 죽을지 알아요. 그러면 흩어진 기름을 안으로 완전히 집결 시키고 죽어요. 왜 모으냐면, 나무의 존재를 지키는 것은 기름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소나무의 간솔로 십자가 목걸이를 만들고, 그 목걸이를 안고 울었어요. 그리고 전도사님들에게 목걸이도 만들어 주고, 내 것도 하나 만들고.. 밤에 잘 때는 양손에 쥐고 자면서 '주님! 이 밤에 나쁜 꿈을 꾸지 않게 해달라고, 주님께서 팔베개해서 저를 좀 재워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저는 일단 눈에 보여야 견딜 수 있었어요, 그때는. 눈에 안 보이면 못 견뎠어요. 십자가를 벽마다, 심지어 화장실에도 붙여놓고는 주님과 대화를 했습니다.


동생과 조촐하게 둘이 밥상을 차려 밥을 먹을 때도 십자가를 가지고 와서 기도했어요. '아버지, 이 음식으로 강건하게 해주시고, 새 힘 받아서 또 일 하게 해주세요.'
제가 나약해서, 제가 못 미더워서. 저의 옛 것이 또 나타나서 제게 어떤 장난을 할지 몰라서. 저는 저를 알잖아요. 그럴 때마다 커터칼로 나무를 깎아 십자가를 만들었습니다. 그때는 커터칼 날을 살 돈도 없었습니다. 집 안 조그마한 베란다에 방석을 깔아 놓고, 너무 추우니까 두꺼운 외투를 입고 작업을 했어요 목장갑 살 돈도 없어서 버려진 목장갑을 동생이 주워오면 빨아서 손가락 부분을 잘라서 몇 겹 묶어 썼어요. 커터칼 날은 문구점에 가면 천 원에 열 개 정도 줬어요. 싼 게 비지떡인 걸 몰랐어요, 조금만 해도 날이 다 나가버리더라고요. 그래도 그 10개라는 분량에 너무 행복했습니다. 칼에 베여서 손에 피도 많이 났습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만드는 동안은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아버지, 오늘은 어땠고, 이런 일이 있었고, 하면서 10~12시간 동안 기도하며 작업을 했습니다. 밥도 10~15분 정도 빨리 먹고 바로 베란다로 가서 작업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큰 것도 만들고, 작은 것도 만들어서 십자가가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나무를 주우러 산에 가서 큰 나무가 있으면 들고 내려올 수가 없어서 산 중턱에서 나무를 밀어버려요. 그렇게 굴리다 보면 나무를 못 찾을 때도 있고.. 찾다가 '아버지, 도대체 굴린 나무가 어디에 있나요?' 이렇게 기도하면 더 좋은 나무를 찾게 되기도 했습니다.

동네에 나무를 사고파는 할아버지가 계셨습니다. 그 할아버지에게 작업장 처마 밑 야외에서 작업을 좀 하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니까 흔쾌히 허락하셨습니다. 너무 감사하게도 할아버지가 사용하고 남은 자투리 나무들, 버리는 화목으로 사용될 느티나무, 박달나무, 주목나무 등을 주셨습니다. 저는 그걸 가지고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작업했습니다. 밤에는 등도 없어서 아주 캄캄했습니다. 그리고 여름에 더운 것은 견딜 만 했지만 겨울에는 찬바람에 발도 시리고 손도 꽁꽁 언 상태로 작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추운 데도 견디게 해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면서 작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저 썩었지만 덩치가 아주 큰 나무가 너무 갖고 싶어요.' 기도하면 그 나무를 마련할 돈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100만 원, 200만 원부터 어떤 건 천 만원, 이천만 원 정도 하는 것도 주님께서 그 돈을 다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 작업실 자리에 새 건물이 지어진다고 해서 이제 거기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때 동생이 새 공간을 알아보았는데 보증금이 1,000만 원이었습니다. 어떡하지? 하고 있는데 저희가 중보기도를 하던 어떤 분이 걱정하지 말라며, 우리가 함께 기도해가며 은혜 받은 것이 얼만데, 보증금은 자신이 마련할 테니 옮기라고 했습니다. 저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며 실내 공간이 있는 큰 작업실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썩고 버려진 나무를 보시면 주님의 마음이 어떻게 느끼시나요?


제가 안 쓰는 단어가 '창조'입니다. 그냥 우리는 '창의'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다 창조해놓은 것을 우리가 창의적으로 찾아갈 뿐입니다. 저는 작업을 하면서 매일 7시간 이상을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 기도를 합니다. 중보기도 하는 것이 너무너무 행복합니다.
다른 생각은 전혀 안합니다. 중보 기도하면서 손만 집중합니다. 제 생각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미 주님이 다 만들어놓은 걸 저는 찾아가는 것이니까요 썩은 거 파내고 더러운 거 없애는 데에 제 생각이 들어가면 결과물이 안 나와져요. 왜 제가 썩은 나무를 좋아하냐면 나무는 일단 완전히 죽어야만 자신을 드러냅니다. 사람도 자아가 완전히 죽어야 주님이 나를 편하게 이끌어 가실 수 있잖아요? 제가 큰 나무를 가지고 작업을 시작할 때 '아, 이만큼 큰 주님(십자가)이 나오겠다.' 생각하고 작업을 시작했는데 벌레란 벌레는 다 나오면서 완전히 썩은 것들을 제하고 나면 마지막에는 아주 조그마한 십자가가 나왔어요. 그때 저는 깨달았어요. '주님은 내가 이렇게 허물 많고 더러워도, 99%를 없애야 해도 단 1% 때문에 나를 이렇게 사용하시는구나.' 그래서 그 뒤로는 작업을 할 때 스케치를 하나도 안 해요. 그냥 나무 갖다 놓고 '주님이 하십니다. 주님께 맡깁니다.'. 기도하며 작업을 합니다. 나무 안에 돌이 박혀 있어서 없애려고 하면 주님께서 '아니야. 그 돌은 너야.' 하시면 저는 '예, 그렇군요.' 합니다. 돌은 나무를 안 품어줘요. 그런데 나무는 돌을 품어줘요. 돌이 나무에 꽉 박히면 나무는 돌이 숨 쉬는 공간을 허용해요. 어떻게 허용을 하냐면 나무는 자기 살을 다 썩게 만들어서 공간을 만듭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아, 주님, 제가 돌이군요. 주님께 박혀서 이토록 아프게 해도 주님은 끝없는 세월 동안 저를 이만큼 귀하게, 손상 하나 안 입히고 품어주셨군요.'

제가 성령 체험을 하고 가장 첫 번째 단어가 '자유함'이었어요. 세상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이 '자유함'. 주님 영접하기 이전의 세월은 손톱 발톱 할 거 없이 비싼 거로 다 칭칭 감아놓고 '나 행복하지? 나 잘 살고 있어. 나 부자야. 난 법 없어도 사는 사람이야. 나만큼 착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이런 교만과 더러움으로 꽁꽁 묶여서 하나도 누리지도 못 하면서. 그 돈 벌어서 어디다 쓰려고 삽시간에, 1초 만에 날아가는 그 돈이 뭐라고. 오늘 주님이 나를 이렇게 귀하게 만들었는데도 주님을 몰랐을 적에는 돈이 뭐라고, 계약이 뭐라고 폭탄주를 만들어가면서 지금 생각하면 너무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나무로 작품을 만들면서 그 썩은 나무가 내 꼴인 거에요. 이런 벌레 나오면 그 벌레가 내 모양 같고, 개미가 무더기로 나오면 그 모양이 내 모양 같고, 곰팡이도 내 모양 같고. 돌도 희한한 게 박혔는데 내가 그만큼 주님께 대못을 박은 것이죠. 나는 큰 돌을 박아놓고는 수 십 년 동안 내가 언제 돌을 박았느냐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나무에 아무런 칠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들기름같은 식물성 오일만 바릅니다. 우리 인생에 금칠한다고 해서 금 인생 되는 게 아니고, 내 오른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 낀다 해서 다이아몬드 인생 되는 것이 아니니까.

슈브 아트 갤러리의 슈브(Shuv)가 무슨 뜻인가요?


슈브는 히브리어로 '온전한 상태로 회복되다.'라는 뜻입니다. 그동안 만들었던 십자가를 전시하고 기도로 회복되기 원하는 많은 분들이 오셔서 기도 하실 수 있도록 안성에 슈브 아트 갤러리를 오픈했습니다. 갤러리 안에 십자가와 함께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오셔서 슈브(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코비드19로 힘들어하는 많은 미국과 한국의 크리스챤들에게 전하시고자 하는 신앙의 메시지와 기도제목 말씀해주세요.
저는 중보하는 기도자라서, 주님 앞에 강인한 용사로서, 충성된 자로서 서게 해달라는 것이 저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이 말은 꼭 하고 싶어요. 제가 코로나로 인하여 한 가지를 새롭게 배웠어요. 코로나가 갑자기 모든 걸 정지시키더라고요. 그래서 생각을 해보니, 아, 이것은 일시정지구나. 우리가 인생을 달려오듯 살아 왔지만, 주님께서 코로나로 인하여 일시정지 시키신 데에는 뜻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교통에도 차가 잠시 정지하는 것이지 끝없이 정지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우리 인생도 코로나19로 인하여 잠시 정지했지만 주님이 해제시키는 그 날까지 '나는 정지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해 보면 이 시간에 주님에 대해서 더 배워야 하고, 주님을 더 가까이 해야 합니다. 주님에 대한 또 다른 모습, 지금까지 주님 옆모습만 봤다 하면, 정면 시선은 어떻게 맞출까? 주님이 하찮은 나로 인하여 어떤 위로를 받으실까? 어떤 시선을 드리면 주님께서 내게 감동하실까? 내가 어떤 기도를 해야 주님께서 감동하실까?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감동이 없으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이제부터 미국에 있는 크리스챤 성도들을 위해 저희 슈브 회원들이 중보기도를 새롭게 시작하겠습니다. 저희가 영적으로 아주 많이 사랑합니다. 힘내세요!

대담 노승빈 (크리스찬타임스 한국후원회 회장, 백석대 교수)·정리 차길영 (세븐에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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