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ce F. Hunt, 1872-1941 (1903년 평양 출생)


한부선 선교사

한부선 선교사는 1903년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 한위렴(William Hunt) 선교사의 아들로 한국의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장성한 후에도 한국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추억을 여러번 회고한 바 있다.

그는 1919년 학업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거쳐 1924년 미국 장로교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했던 프린스턴 신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미국 북장로교회는 신학논쟁으로 어지러웠다. 논쟁의 핵심은 자유주의라고도 할 수 있는 현대주의 신학이었다. 이 강력한 신학사조는 교회로 하여금 성경의 권위를 의심하게 했고 정통교회의 근본적인 교리를 부정하게 했다. 진화론을 수용하거나 사회주의 이념을 교회에 이식하려는 노력도 함께 일어났다. 현대주의를 찬성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이 대립했을 때 무게의 중심은 오히려 찬성하자는 쪽으로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특히 한부선 선교사가 프린스턴에 입학한 1924년에는 현대주의자들이 '오번선언서'를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공공연히 드러냈고 이것을 통해 집결하고 있었다.

한부선 선교사는 프린스턴을 졸업하고 미국북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으로 파송 받아 청주에서 사역을 시작한다. 그동안 미국 북장로교 내에서는 현대주의로부터 교회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새로운 신학교를 세우고 해외독립선교부를 만들었다. 한부선 선교사는 첫 안식년을 맞아 바로 이 새로운 신학교인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수학을 했으며 현대주의 사상에 빠져있던 미국북장로교를 탈퇴해 새로운 교단을 형성하는 데 참여하게 된다. 나중에 이 교단은 미국정통장로교회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다시 한국에 돌아온 한부선 선교사는 사역지를 만주로 옮기고 거기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말씀을 전하고 교회를 세워나갔다.

신사참배 문제가 불거졌을 때 외국 선교사들을 포함한 우리 교회지도자들은 올바른 시각을 가지고 판단하려 애썼다. 일본 관리들이 신사참배와 우상숭배는 아무 상관없다는 식으로 설득했지만 교회는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고 저항했다. 그렇지만 일본 경찰이 강요의 수위를 높여나가자 교회도 처음과 같지 못했다. 오랫동안 저항했던 장로교회도 한계에 이른 조짐이 보였다.

1938년 평양에서 개최된 제27회 조선 장로교총회에 세상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일본당국은 무력으로 협박을 해서라도 장로교회가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가결하게 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회의 전부터 암시했고 결국 그들의 뜻대로 일은 진행되었다. 신사참배를 하기로 결의하면서 교회는 천황과 태양신을 숭배하는 의식에 참여하게 되었다.


일본은 만주에서도 똑같이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그곳의 교회도 공권력에 공공연히 저항할 형편은 아니었다. 만주 선교사 한부선 선교사는 어땠을까? 그는 신사참배의 본질과 교회가 취해야 할 태도를 명확히 했고 실천에 옮겼다. 사실 그는 신사참배를 가결했던 1938년 조선 장로교총회에 참석해서 일본경찰을 곁눈질하며 얼렁뚱땅 회의를 진행하던 의장을 향해 공정한 절차를 밟도록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참된 교회는 사람을 신(神)으로 여길 수 없고 다른 신을 숭배할 수도 없지 않은가! 한부선 선교사는 어른들은 물론이고 아이들에게까지 충성을 권면하면서 천황이 신(神)으로 숭배되는 신사에 절하느니 차라리 어떠한 고통도 감수하자고 격려했다. 결국 어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아이들도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두들겨 맞았고, 몇몇은 퇴학을 당하거나 아예 정규교육을 완전히 포기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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