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일 예배 설교(2020. 11. 15) ❋ - 김요셉 원천침례교회(수원) 목사 -


"끝까지 견디는 자"


(마태복음 24장 1-14절)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3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 오늘 본문은 감람산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예수님이 감람산에 계실 때 제자들이 와서, 성전이 언제 무너지겠으며,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시고 세상 끝날에 어떤 징조가 일어날 것인지 묻는 질문(3절)에 대한 꽤 긴 예수님의 대답과 가르침(4-14절)을 마태가 기록하고 있다.
- 오늘날 한국 성도들에겐 안타까운 종말론 기피 현상이 있다. 어느덧 종말론은 이단의 전유물이 되어버렸다. 이런 현상으로 인해 아예 말세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 자체를 기피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말세와 종말에 대한 비중은 다른 어떤 가르침보다 크다고 할 수 있다.
- 사실 종말론은 위험한 주제기도 하다. 이제부터 살펴보겠지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도 제자들이 이것을 물어볼 때 제일 먼저 주의하라고 말씀하시며 주의부터 주셨다.
- 오늘 본문 속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하라고 가르치시는 세 가지 명령형 말씀을 찾아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4절), 두 번째는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6절), 세 번째는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끝까지 견디라)"(13절)는 말씀이다.


1. 미혹의 위험

- 예수님의 재림과 말세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이 가장 먼저 주신 답변이 바로 미혹의 위험을 경고해 주신 것이다. 종말론은 사탄과 이단이 활용하는 가장 핵심적인 통로기 때문이다. 종말론은 매우 중요한데도 미혹에 빠지기 가장 쉬운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세에 대해 말씀하시며 미혹의 위험을 경고하고 주의하라고 하신 것이다.
- 가장 큰 미혹의 중심에는 사실 제자들이 3절에서 예수님께 찾아와 질문했던 동기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재림과 말세에 대하여 때(시간)와 징조(예측 가능함)를 파악하고 싶은 마음, 호기심이 크다.
- 사탄이 쓰는 미혹은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인본주의적이며 자기중심적인 동기를 자극하는 것이다. 주님의 임재와 말세에 대해 갖고 있는 우리의 관심은 온전히 아는 것이다. 예수님은 언제 재림하실까?
-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이런 것을 포기하라고 경고하고 있다(마 24:36; 벧후 3:10; 계 16:15). 마태복음을 비롯한 성경 곳곳에서는 예수님이 마지막 때에 대해 가르치신 것을 볼 수 있는데, 우리가 말세의 신학, 종말론을 통해 회복해야 할 영성은 그 날과 때에 맞추는 영성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 또 다른 미혹의 위험이 있다. 그것은 말세를 무시하는 미혹이다. 우리에게 말세에 대해 생각지도 않으려고 하는 미혹이 있다. 인본주의적인 사고에 찌들어서 말세가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 성경적인 종말론의 필요와 가치는 무엇일까? 예수께서 우리에게 회복하고자 하시는 초점은 무엇일까?


2. 산통의 이해

- 저는 오늘 본문의 한 구절에 나오는 한 단어를 통해 매우 중요한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사실 우리가 주로 보고 있는 개역개정 성경이 번역될 때 원어의 뜻을 충분히 살려서 번역되지 않아서 한국 교회가 종말론을 굴절시키고 미혹에 빠지는 요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마 24:8)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Mt 24:8, ESV) "All these are but the beginning of the birth pains."
(마 24:8, 쉬운 성경) "이런 일들은 해산의 고통이 시작되는 것에 불과하다."
- 영어 성경 중에 KJV는 'sorrows'로 번역했지만, ESV와 NIV 등은 'birth pains'로 번역하고 있다. 우리말 성경 중에 쉬운 성경만 '해산의 고통'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이 원어에 가까운 번역이다.
- 예수님이 말세와 그 징조를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이 이해하기를 원하시고 오늘 우리에게 주려고 하신 교훈을 가장 쉽고 확실하게 잘 나타낸 표현이 바로 '해산의 고통(birth pains)' 곧 '산통(産痛)'이다.
- 우리가 산통을 이해하면 종말을 성경적으로 이해하는 중요한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24-25장과 요한복음 14-16장에 걸쳐 당신의 재림과 그 사이에 살아야 할 제자들이 지참하길 원하신 영성은 바로 임신부가 임신 기간과 산통을 경험하는 것과 흡사하게 경험하는 것이다.
- 저는 임신 기간을 아내와 함께 네 번이나 경험했다. 물론 아내가 경험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제 경험이 아내의 그것과는 가깝지도 않고 감히 말하기도 두렵지만, 오늘 설교를 해야 하기 때문에 어깨 너머 경험한 임신과 출산의 모티브(Motive)로 오늘 말씀을 조명하면서 풀어 보려고 한다.

⑴ 엄청난 고통과 희생이 동반되는 기다림이다
- 말세에 일어나게 될 많은 재앙을 산통으로 비유하며 우리에게 주시려는 교훈의 첫 번째는 엄청난 고통과 희생이 동반되는 기다림이라는 것이다. 그 고통과 아픔이 무분별하고 무작위한 고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 예수님의 오심이 임박하고 엄청난 고통과 희생이 동반되긴 하지만, 산통을 겪은 모든 산모가 공감하듯이, 거기에는 극심한 아픔과 병행하면서도 그 아픔을 초월하고 능가하는 중요한 기다림이 있다는 것이다. 새 생명의 탄생으로 인한 기쁨이 아픔의 의미를 새롭게 해 준다.
- 아내의 임신은 무수한 희생과 아픔을 동반하는 기다림이다. 여성으로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내려놓거나 포기할 수밖에 없는 희생과 아픔이 동반되었다. 아름다운 몸매, 날씬한 체중, 고운 얼굴의 피부, 마음대로 자유롭고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것을 다 포기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네 번이었다.
- 사실 새 생명을 위해 자신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지 않으면 임신할 수 없다. 하지만 그 희생과 아픔 속에서 인내하며 동반하는 기다림이 있기에 새 생명이 탄생하는 것이다.
- 크리스천에게 종말론은 엄청난 고통과 희생이 동반되는 기다림을 수용할 수 있게 하는 영적 가치가 있다. 오늘 본문 중에서 예수님이 이런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9-12절).
- 아픔의 때가 있더라도 한동안은 그 아픔을 모를 수 있다. 임신하면 반드시 찾아오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희생과 고통과 아픔이다. 우리 크리스천도 마지막 때에 박해와 희생, 고통과 아픔을 겪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그 희생과 고통과 아픔 너머에 있는 것을 기다림으로 끝까지 견디는 자가 되는 것이다.

⑵ 끝이 있고 소망이 보이는, 제한된 고통 속의 기다림이다
- 예수님이 말세에 일어나게 될 많은 재앙을 산통으로 비유하며 우리에게 주시려는 교훈의 두 번째는 끝이 있고 소망이 보이며 제한된 고통 속의 기다림이라는 것이다.
- 만약 기약 없이 기다려야 했다면 결코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9개월(266일)이 지나면 끝이 있다는 사실이 소망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 말세의 정확한 때와 시간을 모른다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찍 올 수도 늦게 올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꼭 온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소망이다.
- 주님은 언제 오실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적인 종말론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확실히 아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은 반드시 오신다는 사실이다. 내가 기대하는 것보다 더 늦게, 더 빨리 오실 수 있다.
- 지금까지 예수님은 언제든지 다시 오실 수 있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런 믿음으로 살았으며,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속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나오는 많은 징후는 시대 시대마다 있는 것들이다. 그런 징후를 통해 우리는 도둑 같이 오실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 가운데 견딜 수 있는 영성을 간직하게 되는 것이다.
- 예수님은 자신이 도둑 같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와 요한도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는 그 시간과 징조를 정확하게 맞출 생각을 포기하라고 한다(벧후 3:10; 계 16:15).

⑶ 깨어서 성실하게 염원하는 기다림이다
- 말세에 일어나게 될 많은 재앙을 산통으로 비유하며 우리에게 주시려는 교훈의 세 번째는 깨어서 성실하게 염원하는 기다림이라는 것이다.
- 종말론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깨어 있는 영성을 가지는 것이다(마 24:42,44). 성경적인 종말론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가치는 '깨어, 성실하게, 염원하면서' 기다리는 영성이다.
- 임신 기간 중에 아내는 한시도 잊어버릴 수 없었다. 많은 변화와 희생 그리고 아픔 속에서도 우리 내외에겐 물론이고 이미 자란 자녀까지도 새 생명이 태동의 날이 임박해 옴을 하루도 잊어버릴 수 없었다.
- 아내는 네 번이나 임신하고 출산하면서 한 번도 진통 완화제를 맞지 않았다. 해산의 아픔과 임박함을 자연적으로 체험하고 싶었던 것이다. 온 몸으로 느끼는 통증을 통해, 점점 더 가까워지는 산통을 통해, 역설적으로 아내가 갖는 소망은 훨씬 더 실제적이고 확실해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 오늘날 우리 크리스천은 진통 완화제를 계속 맞고 살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질의 진통 완화제, 쾌락의 진통 완화제, 자기 도취의 진통 완화제를 맞아가면서 예수님의 재림을 잊어버리고 생각지도 않는다.
-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로 이런 종말론의 진정한 가치를 선포해 주신다. 첫 번째는 등불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의 비유(1-13절), 두 번째는 달란트를 받은 청지기들의 비유(14-30절), 세 번째는 임금이 심판대에서 책망하고 칭찬하는 신하들의 비유(31-46절)다. 왜 그러실까? 종말론의 핵심은 깨어 있어라, 성실하라, 나를 잊지 마라의 교훈을 간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어느 때보다 지금 크리스천들이 깨어 있어야 할 때다. 세상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잘못 되었다고 말하고, 심한 환란과 핍박이 우리에게 오고, 아픔과 고통과 기근과 전쟁 같은 소식이 우리에게 또 우리 주변에 엄습해 올 때, 등불 기름을 준비한 다섯 신부처럼 우리가 영적인 성령 충만의 기름을 채워야 되지 않을까?
- 지금 예수님이 찾으시는 말세를 준비하는 크리스천의 모습은 무엇일까? 저는 성공한 크리스천이 아니라 성실한 크리스천을 찾고 계신다고 믿는다.
-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이 주는 교훈이 또 있다. 소망 속에서 깨어 성실하게 염원을 키우며 말세를 기다리는 마음을 간직하는 가운데 해산의 아픔이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은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마음이다.
(마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 예수님은 언제든지 재림하실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아직 예수님은 다시 오시지 않았을까? 만약 1597년 종교 개혁 직후에 예수님의 재림이 일어났다면? 우리 한민족은 아무도 구원받은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때는 복음이 한국까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나라에 부흥이 일어났던 1907년 평양 대부흥회 기간에 예수님의 재림이 일어났다면?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태어나지도 않았을 뿐더러 천국의 백성으로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가 없었을 것이다.
- 노아의 방주에 모든 동물이 다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셨던 하나님께서 오늘도 복음이 온 세상에게 전파되길 기다리고 계신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이 복음이 땅 끝까지 모든 사람에게 전해지길 원하신다. 그런데 어느 때보다도 지금 그 진통이 가까워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지 않는가?
- 이젠 인터넷 시대로 정말 복음 전파의 끝이 보인다. 우리가 정말 종말론을 믿는다면, 예수님처럼 목숨까지 아끼지 않으면서 복음을 땅끝까지 전해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것을 기대하셨던 것이다.
- 진통이 가깝다. 해산의 진통이 가까워 온다. 그러나 이 진통은 끝이 있는 진통이요 소망이 있는 진통이며, 무엇보다도 새 생명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가진 우리에게 필요한 진통이다.
- 원천교회는 사랑하는 자녀를 품은 엄마처럼 성도 모두가 예수님의 재림을 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힘들고 어려워도 아프고 고통스러워도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그 몸을 통해서 이 땅에 오신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 다시 오심을 품는 산모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설교요약/정리: 안재환 (원천침례교회 집사, 흥사단 부이사장)
▸영문자막 번역/정리: 노승빈 (크리스찬타임스 한국후원회 회장, 백석대 교수)
정두준 (크리스찬타임스 한국후원회 영문서기)
Eli Lee (크리스찬타임스 한국후원회, Deloitte 리스크자문본부)
▸영상편집: 강한빛 (크리스찬타임스 한국후원회 영상편집팀장, 오롯영상프로덕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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