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커 선교사(왼쪽)와 앨러스 선교사

엘러스와 벙커 선교사의 사랑에 관한 단상

애니 엘러스는 1887년 1월 벙커 선교사와 약혼을 하고 후임 여의사가 오는 대로 결혼식을 올리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벙커 선교사와 함께 힘을 합하면 보다 더 선교 사역을 지혜롭게 해나갈 수 있겠다는 기대였다. 벙커 선교사는 엘러스에게 그녀의 진실한 기독교 신앙을 보고 한눈에 반하게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엘러스는 벙커 선교사에 대해 유능하고 훌륭한 기독교 교사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주 마음에 들어했다.

두 사람의 사랑이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지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녀가 조선(한국)에 도착하고 나서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결혼의 가능성이 보였다' 라고 했던 1887년 3월 7일자 편지 내용을 통해 미루어 짐작하건데 이미 조선(한국)으로 오는 배 위에서 대강의 결정이 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둘은 종종 한강이나 궁궐 근처로 데이트를 다녔다. 더 이상 결혼을 미룰 수가 없었다. 그녀는 조선(한국)에서 함께 사역할 것을 기대하며 벙커선교사를 남편으로 맞이했다.

엘러스와 벙커 선교사의 결혼식에 관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자료는 알렌 선교사가 엘린우드 선교부 총무에게 보낸 1887년 7월 5일자 편지이다. 아래의 내용은 그 편지에 기초하여 재구성하였다.

애니 엘러스와 달젤 벙커 선교사의 결혼식은 1887년 7월 초순 화요일 저녁에 알렌 선교사의 집에서 거행되었다. 주례는 육영공원의 교사 길모어 목사였다. 약 50장의 초대장이 당시의 모든 주한 외국인들과 조선인 귀족들에게 배부되었다. 이 결혼식은 서울에서 열린 첫 외국인 결혼식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이 많았다. 초대한 사람들이 대부분 참석하였다. 공간이 협소했기 때문에 결혼식은 간략하게 진행되었다. 왕실에서 보내주고자 했던 악단은 정중하게 사양했고 결혼잔치는 생략했다.

보름달이 비추이는 서늘한 여름밤의 결혼식이었다. 예식장의 중심에는 임시로 설치한 분수가 꽃들 가운데 있어서 주변의 청사초롱들과 어울려 화사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러시아 공사의 아들과 세관 직원의 딸이 신랑신부가 행진하는 길 위에 꽃을 뿌려주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신랑과 신부는 가마를 타고 새롭게 마련된 신혼집으로 향했다. 신혼집은 조선 왕실에서 금팔찌, 금반지 세트와 더불어 선물로 준 것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비단, 식기, 차세트, 커피 세트 등 다양한 선물들을 보내왔다. 모두가 그녀의 결혼을 축하해주었다. 조선(한국)에 온 지 1년 만에 그녀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새 출발을 시작하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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