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결과
로마에 항거한 전쟁에 패함으로써 팔레스타인은 상당 부분 황폐화되었으며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다. 그와 함께 전쟁은 정치적, 경제적 또한 종교적 영역에도 커다란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 정치적 결과 :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팔레스타인은 제3등급에 속한 로마 영토로서 기사 계급 행정관(procurator)의 지휘와 시리아 거주 총독의 감독을 받기는 하였으나 유대 분봉왕의 지배 가운데 있었다. 하지만 전쟁 후 팔레스타인은 독립된 로마 지방이 되면서 제2등급의 로마 영토로 격상된다. 즉, “유대아”(Judaea)라는 라틴어 공식 이름 아래에 로마 집정관(consul) 혹은 법무관(praetor) 계급의 총독이 직접 다스리는 로마 영토로 바뀐다. 다시 말해, 속국의 형태 가운데 부분적이나마 허용되었던 자율권이 완전히 소멸되고, 이제는 로마의 직접 통치를 받는 땅으로 바뀌었음을 뜻한다. 한마디로, 지도상에서 유대 국가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즉, 1948년 독립할 때까지 유대인은 나라없이 2천년 동안 유리방황함으로 예수님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 경제적 결과 : 유대전쟁은 팔레스타인 경제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물과 수공업 원료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상업과 교통도 불리한 산악 도시인 예루살렘은 전쟁과 같은 위기상황을 겪을 시 커다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게 마련이다. 전쟁으로 인해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유대 전역이 황폐화되고 수많은 유대인이 살해된다. 혹자는 팔레스타인 유대 거주민 가운데 3분의 1이 죽었을 것으로 추산한다. 이와 같은 엄청난 손실과 더불어 유대 땅이 로마 황제의 개인 소유로 바뀌면서 팔레스타인의 유대 백성의 다수는 자신들의 경작지를 잃고 노예와 다름없는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로써 유대 백성의 경제적 삶은 피폐해진다.

● 종교적 결과 : 전쟁은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던 유대인의 종교적 삶에도 엄청난 파국을 초래한다.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함으로써 이를 중심으로 하는 유대인의 종교적 삶이 그 뿌리에서부터 완전히 붕괴된다. 동시에 성전 제의의 구심점을 이루던 대제사장 직분이 완전히 소멸된다. 이제 유대인들은 성전세 대신에 로마에 소재한 쥬피터 카피톨리누스 신전에 바치는'피스쿠스 유다이쿠스'(fiscus Judaicus)라는 형태의 세금을 굴욕적으로 드려야만 했다. 이로써 성전제도가 붕괴되었다는 사실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전쟁으로 인해 예루살렘과 성전 외에도 유대교의 중심 자치 조직인 '산헤드린' 공회가 소멸한다.

산헤드린은 70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조직으로 예루살렘에 소재한 유대 최고 재판소이며 행정기관이다. 최고 책임자인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사두개파 귀족들이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바리새파 서기관뿐만 아니라 유대 공동체를 대표하는 장로들로 구성된다. 산헤드린의 중요 역할은 토라에 관한 민법적이며 제의법적인 해석과 적용, 재판권, 전쟁과 평화를 결정하는 일, 성전 감시, 명절과 축제일과 관련된 종교적 실천 사항을 규정했다. 산헤드린의 소멸은 유대인의 자치 정치 조직의 붕괴를 뜻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핵심 구성원인 사두개파의 소멸을 뜻한다.

예루살렘 교회와 관련하여 예루살렘 교인 중에 개인적으로 전쟁에 동참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으나, 예루살렘 교회(원시 기독교 공동체)는 과격한 열심당원을 이끄는 메나헴과 같은 인물에 거는 정치적 메시아 대망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신앙을 가졌기에 전쟁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다고 생각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로마군의 임박한 공격에 처해 있으면서도 내전으로 얼룩진 예루살렘을 떠나 요르단 동편에 있는 페트라로 피신한 것으로 보인다.

교회사가 유세비우스는 자신의 <교회사>(제3권, 5,3)에서 예루살렘 멸망과 그리스도인들의 피신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한. “마침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주어진 계시에 따라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그 도시를 떠나 페트라로 불리는 베레아의 한 도시에 정착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떠나고, 또한 동시에 그 거룩한 사도들이 유대인들의 수도와 온 유대 땅을 완전히 비웠을 때,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에게 범한 수많은 악행으로 인해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여 이 불법자들을 인간사에서 완전히 멸절시켰다.”여기에서 유세비우스는 예루살렘 멸망과 유대인들의 죽음을“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평하고 있다. 이어지는 진술 가운데 이 심판에 대해 더욱 분명히 말한다: “유대인들이 만민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에게 수난을 가한 바로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공의를 나타 내셔서 멸망이 그들을 덮쳐 마치 감옥에 갇힌 듯이 그곳에 갇힌 것은 참으로 공정한 일이었다.” 이와 같은 유세비우스의 진술은 반유대적 시각에서 내린 신학적 평가다.

유대교 회복운동과 랍비 유대교의 출현
유대전쟁은 팔레스타인 유대교에 대참사를 초래하였으며, 그로 인해 유대교의 대변혁을 이끌게 된다. 전쟁으로 인해 당시 팔레스타인에 존재했던 중요 종파인 사두개파와 에센파 및 열심당에 속한 사람들이 전멸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이들 종파는 커다란 피해를 보고 사실상 소멸되고 만다. 그러나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아 황폐화된 유대교 전통을 다시 추스를 수 있는 유일한 그룹이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온건한 노선을 따르던 바리새파였다. 이들은 유대 종파 중 가장 많은 회원을 갖고 있었으며, 헤롯대왕 시대 이후 정치권과는 거리를 둔 민간 경건 운동을 주도했던 종파였기에 전쟁의 피해를 상대적으로 적게 입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훗날 이들은'랍비'로 불리게 되고, 나라와 성전이 없는 상태에서 유대교 회복을 위해 전면에 나선다.

예루살렘 성전 멸망 후 유대교 회복운동과 관련하여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요하난 벤 차카이'이다. 랍비 요하난 벤 차카이를 주축으로 얍네·얌니아에서 일어난 유대교 회복 운동은 새로운 형태의 유대교의 출현을 알린다. 그것은 더 이상 성전과 희생제의에 의존하지 않고 이른바'예쉬바'(Yeshibah, 토라 연구 학교)를 중심으로 하는'랍비 유대교'(rabbinic Judaism)의 출현이다. 랍비 유대교 전통은 중세기를 거치는 가운데 이른바 “정통 유대교”를 형성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대 사회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유대전쟁과 예루살렘 성전 멸망은 새로운 형태의 유대교를 낳았을 뿐 만 아니라 향후 초기 교회의 발전에도 영향을 끼친다. 전쟁이 끝난 후 예루살렘에 다시 기독교 공동체가 생겼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각 지역 교회 지도자들이 그 지역의 교회들을 선도하면서 해당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개별적인 선교사역이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유대인들은 전쟁에 동참하지 않았던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더 이상 유대교에 속하는 무리로 간주하지 않고, 보다 확실히 다른 교단으로 간주하게 된다.


예루살렘 멸망은 예수님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만이 아닌, 유대교 중심의 역사에서 기독교 역사로 변하는 획기적인, 팔레스타인 중심에서 세계로 뻗어가는 사도행전 1장 8절의 사건이며, 결과론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 그대로 드러난 사건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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