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의 태국 선교, 5백여 명의 결신자 나와


태국에서 지낸 3년의 선교 사역은 은혜와 간증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느 날, 태국 북동쪽 '람빵'이란 곳에서 야외 전도집회를 일주일간 해달라는 초청이 왔어요. 이 사람들이 음악과 춤추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지라 나팔 불고, 북치고 하면서 사람들을 끌어들이느라 난리였어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말씀을 전했는데 그날 아침에 제가 이런 기도를 했었어요. '하나님, 큰 물고기 좀 잡게 해주세요”라고.

그날의 설교는 소승불교의 십계율을 터치하면서 서두를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이 믿는 불교에 십계율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와 비슷한 십계명이라는 것이 기독교에도 있다. 그런데 십계명을 지켜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 죄의 문제를 해결받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믿는 십계율을 지켜서도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면서 복음을 전했어요. 집회가 끝나고 결신자 초청을 했는데 그날따라 딱 한 사람만이 손을 들었어요. 저로서는 많이 실망스러웠죠. 집회가 끝나고 그 결신자를 데리고 상담을 하는데 이 사람이 아주 거물급인거예요. 승려들에게 불도를 20년째 가르치고 있는 사람이래요. 이 사람 하는 말이 자기는 이 불교말고도 더 깊은 진리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했었대요.

그런데 이날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면서 궁금했던 것의 답들이 딱딱 맞아들어간 거예요. 그렇게 그분이 눈물을 흘리면서 그날 예수를 영접했어요. 자기가 지금 딸네집을 방문 중인데, 고향에 가서 기독교를 전하겠다고 하는데 그분이 뭘 알고 전하겠어요? 그래서 태국어로 된 신·구약 성경과 전도의 책자를 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런 경험은 하나님의 역사로밖에 설명할 수가 없어요. 태국에서 지냈던 3년의 짧은 기간 동안 저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 502명 쯤 됩니다. 불교 나라에서 참 불가능한 일이었죠.

한번은 어느 미션 고등학교에서 집회 초청을 받았어요. 아침에는 설교를, 오후에는 선생님들을 가르쳤는데 마지막인 셋째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십자가 메시지를 전했어요.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시고, 어떻게 죽으셨는지 등등을 전하는데 아이들은 웃고, 떠들고, 성경을 집어던지고 엉망인 거예요. 그날 집회는 완전히 망쳤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 아이들이 미션스쿨을 다니고는 있지만 불교나라의 분위기 속에서 자라잖아요? 불교의 교리에 의하면 전생의 업보가 얼마나 더러우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렇게 죽었냐는 거예요. 아, 정말 놀랐어요. 가난해도 벤츠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생의 업보를 자랑하려고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전 그런 것을 몰랐죠. 돌아오는 길에 차안에서 많이 울었습니다. '하나님, 내가 뭣때문에 선교사로 있습니까? 한국으로 돌아가야겠어요. 내가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를 전했는데 오늘 이꼴이 되었네요.' 하면서…

이 일로 인해 태국의 문화에 대해서 더 배워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그 나라의 문화를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해답을 찾았는데 불교에는 신이 없고, 대속이라는 것이 없어요. 부처가 보리수 나무 아래서 깨달은 인간의 종교가 불교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어느 교회에서 일주일 집회를 인도해달라는 요청이 와서 통역과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십자가로 시작하지 않고, “하나님은 정말 계신가, 보이지도 않는데 어디 계신가”하며 변증론적인 설교로 풀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창조에서부터 차례 차례 설교하며 마지막 날 복음을 전했습니다. 집회가 진행되는 동안 지역에 소문이 나면서 구경꾼들이 몰려들었어요. 자기네랑 똑같이 생긴 사람이 영어로 설교한다고. 마지막 날,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가를 설명하며 결신 초청을 했습니다. 그날 스물 여섯명이 나와서 통곡하며, 예수님을 영접했어요. 그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 26명 중 하나는 그 지역의 아주 유명한 강도래요. 3개월 후에 그 목사님을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예수 믿게 된 그 강도를 기억하냐고, 물론 기억하고 매일 기도한다고 했더니 그 사람이 강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못마땅해했던 그 부류 중의 하나가 청부업자를 시켜 죽이려고 하다가 동생만 죽였다고 전해주더군요. 그런 얘길 들으면서 참, 강도가 구원받다니 … 하나님의 역사는 제한이 없다는 생각을 다시 했어요.


태국의 남부인 '나콘시 타마라'라는 곳에서 전도 집회초청이 다시 왔습니다. 당시 남쪽에는 공산주의 게릴라가 많았는데 한번은 선교사들이 탄 배에 총격을 가해 몇 사람이 죽기도 했어요. 내가 이젠 못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족을 주님께 맡기는 기도까지 하고 떠났어요.

나를 초청한 태국 목사가 볼보 승용차를 타고 나왔는데 기사하고 대화를 나눠보니 경력이 27년이나 된대요. 차도 좋고, 운전사도 좋고 마음이 놓였어요.(웃음) 몇 년이나 이 분(목사)하고 일했냐고 물어보니 7년이나 된다길래 “어느 교회를 다니세요?”했더니 흥분한 얼굴로 “내가 왜 교회를 다녀야 돼냐?”는 겁니다. '전도집회를 열흘이나 하러 왔는데 이 사람 전도 못하면 내가 무슨 전도자야?'하는 생각이 훅 들어왔습니다.

한 장소에서 두 번씩 이틀간 설교하고, 다음 지역으로 이동하는 열흘간의 일정이었어요. 저는 호텔에서 묵었지만 기사는 어디서 잤는지가 궁금하여 가보니 수채물이 옆으로 흐르고, 쥐들이 다니는 그런 곳이었어요. 기사에게 당신이 운전을 제대로 못하면 나의 목숨이 위태로운데 내가 여기 있는 동안 나와 같이 호텔에서 지내자고 했어요. 처음엔 사양했지만 나의 강권함에 그 사람과 통역 그리고 제가 한 방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아침 식사도 같이 먹고, 화장실 가는 것 외에는 저와 늘 동행을 시켰습니다. 집회는 대상이 매번 다르기 때문에 같은 설교를 해도 되는데 이 운전사는 저의 설교를 매 집회마다 듣고 있어서 그를 위해 다른 설교를 만드느라 고생 좀 했어요. 다른 지역으로 이동중에 자기 집이 있는데 들려도 돼냐고 해서 흔쾌히 그러라고 했어요. 제가 아내까지 같이 데리고 가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집회 중에 예수님 영접할 사람 일어나라고 했더니 기사가 먼저 일어나고, 부인이 일어나더라구요. 그날 진짜 얼마나 감격했는지 집에 가는 내내 찬송을 불렀습니다.

호텔에서 함께 기도하려는데 엄청 망설이며 “오늘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니 죄가 생각났다.”는 겁니다. 말인즉 자기가 아내 몰래 다른 여자가 넷이나 있대요. 나는요, 까무라칠 뻔 했어요. 어떻게 그 가난한 운전사에게 여자가 넷이나 있을 수 있는지… 그러면서 오늘 그것이 죄인줄 깨달았다며 청산하겠대요. 그러면서 자기를 너무나 사랑하는 한 명은 끊을 수 없다며, 앞으로 전도하려면 끊으면 안된다고… “전도하기 위해서 죄를 계속 짓겠다고?”했더니 울기까지 해요. 그 날밤 일단 기도해주고, 다음 날 새벽, 기도를 하는데 무슨 소리가 나서 보니 그도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어요. 열흘간 같이 지내며 새벽 기도를 배운 거죠. 그러면서 자기를 사랑하는 과부도 끊기로 했대요. 어제 믿은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3개월 후에 다른 지역으로 집회를 갔는데 그 기사가 기차역에 나왔어요. 내 손을 잡고 놓지를 않아요. 지난 3개월은 천국이었다며… 태국에서 3년간의 짧은 경험은 저의 인생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들어줬는지 모릅니다.

가장 힘들었던 전도의 케이스


예수님을 영접했을 당시 우리나라에 CCC가 들어왔습니다. 사영리 전도법을 훈련까지 받아서 전도하는데 아무도 안믿는 겁니다. 하루는 하나님께 “하나님, 제가 전도훈련까지 받고 전도하는데 아무도 안믿어요. 오늘 마지막으로 전도해보고 오늘도 아무도 안믿으면 다신 안할거예요.”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고등학교 2학년 아이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아마도 99명은 전도에 실패했을 거예요. 그런데 이 한 명때문에 앞의 실패는 다 잊어버리고, 너무나 기쁘기만 했어요. 그리고 그 친구의 양육을 시작했죠. 그때 제가 깨달은 것은 '진짜 전도자는 진짜 목회자다.'라는 거였어요. 자기가 낳았으니, 자기가 양육하는 거예요.


또 한번은 전도하려고 어느 병원엘 갔어요. 문을 열어 보니 아줌마들 여섯 명이 있는데 말을 못하겠어요. 뒤돌아 나오는데 깔깔대며 웃는 소리도 들려요. 근데 아줌마들 중 한 분의 몸이 엄청 부어보여요. 나중에 보니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분이었어요. 다시 들어가 그 부인에게로 가서 성경 얘기를 좀 해도 되겠냐고 했더니 그러래요. 그때는 성경을 잘 몰라서 펼쳐볼 대목이 없었어요. 그래서 간증을 하겠다고 했죠. 그런 다음 “예수님 믿으실래요?”했더니 눈만 깜빡거려요. 몇 번의 방문끝에 결국 이분이 예수를 영접했는데 저에게 유언으로 “아들이 하나 있는데 집을 나가 깡패가 되었는데 그에게 복음을 전해달라”고 하는 것이었어요. 물론 “제가 그 유언을 꼭 지키겠다”고 약속 했습니다.

그주 토요일에 아들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유언을 받았기에 장례식에서 “언제든지 내 도움이 필요하면 오라”고 얘기했죠. 당시 저는 고등학교에서 영어강사로 지내고 있었는데 정말 그가 어느날 찾아와서 봉급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돈을 꿔달라고 하는 겁니다. 유언이 생각나 그냥 주는 것이라며 돈을 주었어요. 그 이후로도 계속 저를 찾아왔고, 찾아올 때마다 반가운 마음이었어요. 어느날 또 와서는 깡패의 생활을 청산하고 책 장사를 하려니 돈이 필요하다고 해요. 저더러 책을 사라고 하는데 저는 사실 예수믿고 나서 푼푼이 모은 영문서적 400권도 다 버리고, 오직 성경 하나만을 남겼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어머니의 유언때문에 그 책을 또 샀어요.

어느 날 또 왔길래 여름 수련회에 가자고 초청했습니다. 그 친구가 결국 거기서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10여년 연락이 끊겼는데 어느 결혼식작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어요. 너무도 궁금해“너 지금 교회는 다니냐?”고 했더니 착실하게 직장생활도 하고, 어느 교회의 재정부장이라며 옛날의 자기가 아니라고 해요. 그때 너무나 기뻤어요.

전도는 대화에서 시작된다


1976년 에즈베리 신학교에 학생으로 와서 전도학을 배울 때, 로버트 코울만(Robert Coleman) 박사께 실제적인 것도 배울 수 있도록 제임스 케네디 목사님(전도폭발 창시자)이 있는 교회로 보내주길 요청드렸어요. 그리고 케네디 목사님에게는 전도를 나가실 때 저를 두 번만 같이 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말씀드렸죠. 그리고 그 교회에 있는 부목사들 11명을 한 명당 2시간씩 인터뷰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그 교회의 부흥을 알고 싶었거든요. 그 분은 과연 전도자이셨어요. 어떤 아주머니를 만나 15분을 얘기하니 울면서 하나님을 영접하더라구요. 그리고 저는 전도폭발을 한국으로 들여가 목회자도 훈련시키고, 서울신대에 있으면서 학생들도 훈련시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전도할 때는 전도폭발을 잘 사용하지 않아요.

교회 생활을 많이 했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잘 먹힙니다. “당신이 지금 죽으면 천국갈 수 있느냐?” 이런 거요.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천국 자체를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상황에 따라, 대화를 먼저 나누려고 합니다. 상대방의 관심사와 얘깃거리를 먼저 신중하게 찾아요. 그 사람의 눈높이에 대화를 맞추세요. 대화를 통해 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목사들의 문제 중의 하나는 대화의 주도를 늘 자기가 가지고 있어요.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그의 신뢰를 끌어내세요. 또한 죄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는 아주 조심스럽게 하세요.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한 십자가 얘기는 미뤄놓으세요.

로버트 코울만(Robert Coleman) 박사는 두 가지는 마스터해야 한다고 그러세요. 첫째는 성경, 둘째는 조직 신학이래요. 성경을 많이 알아도 조직적으로 전하는 것이 전도라는 거예요. 제가 쓴 책에 성경에 관한 것이 많은 것도 그분으로부터 그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교회 사역


보스톤에서 교회를 개척한 적이 있지만 한국서 교수생활을 하면서 교회 사역을 맡을 수는 없었어요. 목회자의 이중직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죠. 그런데 학교의 교수 한 분이 총회에 질의를 한 적이 있어요. 어느 장로교회에서 30여 명이 나와서 교회를 개척하자고 하는데 이럴 땐 어떻게 합니까 하고요. 그런데 기관장이 허락하고 지방회장이 승낙하면 적극적으로 추천한다고 하더라구요. 저도 1년을 지켜보다가 개척을 하게 되었어요. 1년만에 장년만 100명 정도로 부흥했습니다. IMF로 분납금이 어려워진 건물주로부터 2년만에 빌딩을 사게 되었는데 서울신대 이사회에서 조사위원회가 나왔어요. 먼저 교회를 개척한 교수의 교회는 부흥이 안되는데 제가 맡은 교회가 부흥하니까 문제를 삼은 것이죠. 이중직이란 것은 언제나 봉급이 걸리게 됩니다.

그런데 저는 교회를 하면서 봉급을 십원도 받은 적이 없어요. 인간관계때문에 강사를 초청할 때가 있잖아요? 그럴때도 나때문에 온 것이므로 사비로 강사비를 드렸어요. 내가 교회돈을 못쓰는 것은 교회돈은 '핏돈'이라고 믿기 때문이예요.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은 사람이 감사해서 헌금한 거예요. 그런데 돈 벌기가 얼마나 힘들어요? 돈버는 것은 하루 24시간 중 아침 9시부터 저녁까지 자신의 가장 골든타임을 바치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십일조를 떼어 헌금하는 거 거든요. 그런데 목사들이 그돈을 가볍게 여기고 막 써요. 난 그런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써본 적도 없어요. 돈을 벌어보고, 늦게 신학한 사람의 장점이기도 하죠.

결국 조사위원회는 아무 것도 찾지 못하고, 저는 걸린 것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저는 교단에 대해 정말 너무나 큰 실망을 했습니다. 제가 서울 신대 있으면서 안식년을 가진 적이 한번도 없었어요. 제가 1년을 쉬면 전도를 가르칠 사람이 없거든요. 그런데 실망감이 너무 커서 안식년을 신청했는데 에즈베리 학교의 총장으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안식년을 지낸다고 하던데 사실이면 1년동안 우리 학교에 와서 가르쳐달라”고해요. 그래서 교환교수로 에즈베리에 와서보니 2년에 한 번씩 국제적인 명성이 있는 교수를 초청, 봉급을 Full 로 주면서 가르치도록 하는 카테고리에 들어있더군요.

다시 교회를 섬기다


한국으로 들어와 전에 섬기던 교인들과 다시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6개월 정도가 지나 120명 정도의 새신자들이 왔다가 60명 정도만 정착하고 나머지는 떠나는 것을 보면서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알아보니 내 설교가 너무 어렵대요. 친한 친구 목사에게 “왜 우리 교회가 부흥이 안될까?”했더니 조언을 해주는데 “첫째, 집회를 나가지 마라. 둘째, 미국을 가지마라. 집회 때문에 일년에 몇 번씩 갔었거든요. 셋째, 통역을 하지마라. 넷째, 신학교 강사를 그만둬라. 다섯째, 테니스를 포기하라. 여섯째, 글쓰는 것을 포기하라. 그러면서다른 사람들은 목회에 100% 올인한다. 그래도 교회가 성장할까, 말까 인데 너는 몇 가지를 사이드로 하고 있는데 그러고도 교회가 성장하길 바라면 얌체다”라고 하는 겁니다. 엄청 충격이었지만 다 맞는 말들이었어요. 다른 것은 다 포기하겠는데 글쓰는 것만큼은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했더니 그러면 목회를 포기하라고 그러더군요. 그러고 나서 보니까 교인들이 너무 불쌍했어요. 그래서 기도를 하면서 풀타임 목사가 와서 교회를 섬기고 저는 사임을 하기로 결정을 했어요.

아직도 꿈꾸는 것들

글을 쓰는 것과 가르치는 것을 계속하고 싶어요. 목회자와 신학자, 전도자의 삶을 살아왔지만 나는 전도자이기를 더 원합니다.

대담 이윤태 발행인·정리 한상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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