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신학교 교수진들

8.15 해방을 맞은 정통주의 한국장로교회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투옥됐던 목사들과 많은 신도가 석방되고, 학도병, 징병, 징용, 정신대로 끌려갔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돌아오고, 그야말로 기쁨의 도가니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러나 38선이 막히고 한반도가 두 동강이 되는 비운을 맞을 것을 누가 알았으랴.
평양신학교 교장 채필근 목사는 친일파로 몰려 소련군에게 끌려가고, 대신 김인준(金仁俊) 목사가 대를 이었다. 나는 그가 교장으로 계시는 학교에서도 한 학기를 공부하다가, 교수진도 점점 약해지고 교통도 어렵고 해서 등교를 하지 않았다. 그 후에 김인준 교장도 보안대에 끌려가 행방불명이 되고, 후임으로 오셨던 이성휘(李聖徽) 목사도 차례로 끌려가 종적을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공산 정부의 방침을 따라 기독교연맹이 조직되고, 모든 교단과 신학교들이 하나로 통합 되면서,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치던 교수들과 학생들 대부분은 그 연맹신학교를 거부하였다. 나의 부친(박경구 목사)도 황해노회 파견으로 교수하시다가 연맹신학교가 되면서 물러나셨다. 6·25 동란과 함께 북한에는 교회도 신학교도 사라지고 말았다. 결국 새 평양신학교는 주의(主義) 주장(主張)도 없이 약 10년간 존속하다가 유야무야한 존재로 없어지고 말았다.
조국 해방과 함께, 신사참배 문제로 갇혔던 분들이 석방되면서, 신앙 절개를 지키지 못한 한국 교회를 향하여, “회개하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강단에서 내려와 근신하라”고 부르짖었지만, 호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그들은 재건파니 복구파니 하는 조직을 이루었다. 38선으로 막히고 이북에는 자유가 사라지게 되어 출옥성도라는 분들이 이남에서 조직을 만들고, 한상동, 주남선 목사 등이 한부선(Hunt Bruce) 선교사와 박윤선 목사 한명동 목사 등과 손을 잡고, 진해시에 있는 이약신 목사 교회에다 고려신학교를 세우고, 고려파 교단을 만들어, 전국을 향하여 “회개하고 우리에게로 돌아오라”고 외치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부산으로 그 신학교 위치를 옮겼다. 부산 용두산 중턱 광복동 산 1 번지 적산가옥으로. 그러나 그들의 부르짖음은 한국교회를 움직일 만큼 큰 것이 아니었다.
북한 공산 정권의 탄압을 피하여 많은 기독교인들, 특히 공산 정권의 눈총과 사찰을 받는 지도자 급 목사들이 대거 이남으로 넘어오고, 이남의 교회 지도자들이 모두 신학교의 필요성을 느끼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는 동안 이미 서울에 있던 조선신학원은 절호의 기회를 만나게 되었다. 그 신학교의 성격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터에, 신학교의 필요성을 느끼는 지도급 목사들과 장로들은 조선신학원을 남한 장로회 총회의 직영신학교로 삼자는 운동에 쌍수를 들어 환영하였다. 서울에 있는 기존 교회 목사들, 이북에서 내려와 피난 교회를 세운 목사들, 영호남의 많은 교회 목사들이 모두 조선신학원의 총회 직영화를 환영하였다. 교장에 송창근, 교수에 김재준, 한경직, 최윤관, 그리고 전임 강사에 전성천, 조선출, 정대위, 그리고 시간강사에 유호준, 강신명, 김양선, 황선희, 이정로, 이덕흥 등 시내교회 목사들이 가담하였다. 그리고 구레인, 조하파등 남장로교 선교사와 서고도, 배레사 등 캐나다 선교사들도 출강을 하도록 하였다. 학생으로는 평양신학교와 중국 심양의 동북신학교에 다니던 학생, 일본의 여러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사람, 조선신학원 재학생, 그리고 새로 신학에 뜻을 두고 온 사람 등 잡다 한 학생들이었다.
그 신학교의 신앙과 신학의 노선은 어떤 것이었나? 물론 아무도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거기에 모여온 학생들은 대부분 그냥 정통주의 보수 신앙 속에서 자란 순진한 학생들이었다. 다른 사상이 어떤 것인지, 그런 것이 있는 것인지 조차 분간하려고 하지 않고, 또 할 수도 없는 순진한 학생들이 거의 다였다. 나 자신도 그런 부류에 속하였다. 정통보수 사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다만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지금까지 믿고 아는 것 안에서 분간 없이 살아온 것이다. <계속>
박창환 목사
전 장신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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