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주의자들 자신들은 이 세 부류 중 구원을 성취할 가능성이 가장 큰 영적인 인간의 부류이며 기독교인들은 정신적인 인간의 부류라고 주장하였다. 영지주의자들은 또 이 세 부류의 사람들 중 영적인 인간과 정신적인 인간만이 그노시스를 가질 수 있으며, 물질적인 인간은 이번 생에서 그노시스에 도달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 이유는 물질적인 인간은 물질에 너무 몰입해 있기 때문에 더 높은 차원의 실체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에 대해서도 여러 견해를 가졌다. 다수의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를 지상의 인류를 구원할 수단인 그노시스를 인류에게 가져다주고 가르치기 위해 지복의 플레로마(천국)를 떠나 고통이 가득 찬 물질계에 탄생하는 희생을 기꺼이 감수한 존재로 지고한 존재의 물질적 화신이라 여겼다. 반면에 일부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를 거짓 메시아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세례 요한을 특히 중시하였는데 예수가 세례 요한이 위탁한 거룩한 가르침들을 타락시켰다고 생각했다. 어떤 영지주의 가르침에서는 예수가 아니라 아담과 이브의 셋째 아들인 셋이나 마니교의 창시자인 마니를 메시아(구세주)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또 나그 함마디 문서(Nag Hammadi library, 1945년 발견된 중요한 영지주의 문서) 문헌 중 하나인 '이집트 복음서'는 아담과 이브의 셋째 아들 셋을 예수의 전생으로 보았는데 물질계라는 감옥으로부터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신이 셋이라는 메시아로 화신했던 것처럼 예수 또한 동일한 목적으로 다시 메시아로 나타난 것으로 보았다.

또한 영지주의자들은 예수의 생애에 대해서도 정통파 기독교의 견해와 다른 견해를 주장했는데 예를 들어 현존하는 대표적 영지주의 문서 중 하나인 '피스티스-소피아'에 따르면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한 다음 하늘로 승천하여 지상을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라 이 승천 후 다시 지상으로 와서 지상에서 자신의 제자들을 11년간 더 가르쳤는데 그 가르침은 첫 번째 신비(First Mystery)를 완전히 알 수 있게 하는 가르침이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학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영지주의 운동을 기독교의 한 분파로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 탄생 이전에도 영지주의 체계가 존재했었다는 다른 학설이 제기되었다. 이 영지주의 운동은 주후 3세기에 이르기까지 로마 제국과 고트족의 점령지 또 사산 조 페르시아의 영토 등 지중해 세계와 중동으로 전파되고 발전하였다. 그러나 니케아 공의회와 여타 다른 칙령들을 통해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파괴되는 등의 일이 있었던 주후 4세기에는 기독교의 탄압으로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 시기에 영지주의 문헌들의 거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사라졌으며 영지주의 반대자들이 영지주의를 논박하기 위한 문헌의 근거 자료로 남겨두었던 영지주의에 대한 소수의 단편들만이 살아남아 있다.

나그 함마디 문서(Nag Hammadi library)가 발견된 1945년까지 영지주의 연구자들은 이런 2차 자료들을 토대로 추론에 근거한 연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주후 4세기 이후에는 많은 영지주의자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했으며 남아 있는 유럽의 영지주의자들도 십자군의 활동으로 인해 그 수가 크게 감소했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인 소수의 만다야교 (Mandaeism) 공동체들이 현대에도 남아 있다.

그러나 1945년에 발견된 나그 함마디 문서에 포함된 영지주의 1차 문헌들은 영지주의와 초기 기독교에 대한 학자들의 이해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 결과 영지주의 사상은 다시 19세기 후반과 20세기에 와서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많은 밀교적 신비주의 운동의 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들 중 일부는 자신들을 고대에 있었던 영지주의 운동의 부활 또는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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