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태어나 남한에서 성장하고, 미국에서 교육받아 세계에서 사역한다”

밥 존스 대학교 동창회지에 실린 위 문장은 송용필 목사의 인생을 한 줄로 요약하고 있다.

수원역 앞에서 구두를 닦던 소년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미국유학 길에 올라 고등교육을 받고 목사가 됐다. 대한민국 땅을 다시 찾은 1978년, 42세의 송용필은 하나님 안에서 전혀 다른 인생으로 변화되어 있었다.

그는 17년간 극동방송 부사장으로 일하면서 대한민국에 어와나(AWANA)를 처음 시작했고, 비영리 사단법인 국제구호단체 인터내셔널 에이드 코리아(International Aid Korea)를 창립했다.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대외부총장으로도 섬겼던 그는 한국독립교회선교단체연합회(KAICAM) 연합회장, 한국원로목사총연합회 대표회장, 올림픽 채플린 등으로 헌신해 왔다.

실로 역전(驛前) 인생이 역전(逆轉)의 인생으로 거듭난 것은 하나님의 예비하심이자 계획이었다. 그가 겪어야만 했던 고난의 경험들은 후일 위기의 순간에 결정적인 기지로 발휘됐다. 송 목사가 자신의 모든 인생, 작은 것 하나까지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북방선교의 비전을 따라 한국으로 온지 43년 만에 송용필 목사는 미국으로 향한다. 오는 11월, 미국으로 떠나는 그는 85세의 나이에도 다시 새로운 선교의 비전을 펼치겠다는 마지막 꿈을 가슴에 품고 있다. 바로 유튜브를 활용한 영상선교다. 극동방송에서 매일 성경공부를 진행했던 그에게 방송은 매우 친숙한 도구다. 송용필 목사의 발걸음이 말해주고 있다. '열정은 늙지 않는다'고.

되는 일이 없던 인생, 첫 예배를 드리다

송용필 목사는 함경남도 장진군 상남면 창평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장진면 면장을 지냈고, 해방 무렵 온 가족이 충청남도 공주로 피난을 내려왔다. 가난은 송 목사의 중학교 진학을 좌절시켰고, 일자리를 찾아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도강증이 없었던 송 목사는 한강을 건너지 못했고 겨우 미군트럭을 얻어타 수원역에 이르렀다. 양아치 소굴에 잡혔다가 목숨을 걸고 탈출해 수원역전 파출소로 뛰어든 송 목사는 경찰의 도움으로 구두 닦는 기술을 배웠고, 수원역 대합실로 진출해 미군들 구두까지 닦게 됐다.

역의 일을 돕기도 했고, 갱생회(홍익회)에서 도시락을 팔기도 했다. 철도원이 되고 싶다는 꿈을 안고 검정고시에 합격해 철도학교에 입학서류를 제출했으나 나이 제한에 불과 한 살이 많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한 그 때, 송 목사는 교회 십자가 불빛을 따라 생애 첫 예배를 드리게 된다. 매산감리교회였다.

포근함과 기분좋음을 느낀 그는 계속해서 교회를 다녔고, 성경말씀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고등학교에 다시 진학함과 동시에 교회 종치기의 일을 맡은 송 목사는 수원역 대합실을 떠나 교회로, 다시 가정교사로 보금자리를 옮기게 됐다. 중앙대 상과대학에 진학하면서는 뜻밖의 인연들이 이어지면서 서울에서 새로운 가정교사 자리를 얻게 됐고, 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기까지 도움의 손길은 계속됐다. 송 목사는 인생의 고비마다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믿음이 자신을 이끌고 있다고 생각했다.

김장환 목사와의 만남, 미국 유학에 오르다
평생의 멘토인 김장환 목사를 만난 건 그 즈음이었다. 처음으로 '크리스천이라는 증거'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고, 그제서야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했다.

오산비행장 윌리엄 대령과의 인연은 생각지도 않았던 후원자를 붙여줬고, 언감생심 미국 유학길에 올라 김장환 목사가 졸업한 밥존스대학교로 향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미국이었지만 오히려 더욱 주님을 의지하고 신뢰할 수 있었다. 로드와 로메인 부부의 든든한 후원으로 밥존스대학교에 입학한 송 목사는 주판의 활약으로 회계학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곳에서 유일한 한국인 여학생이었던 박계심 사모도 만나 졸업식 날 아름다운 교정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다.

'북한 복음화' 사명에 사로잡히다

친구와 함께 회사를 차리고 성공한 회계사로서의 보장된 인생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송 목사는 하나님의 은혜와 대한민국을 떠올렸다. 열왕기하 7장에 등장하는 네 명의 나병환자 이야기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 그는 '내 배만 채울 것이 아니라 북한에 들어가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혔다. 자신이 태어나 떠나온 북한 땅을 품은 송 목사는 “북한 복음화를 위해 새롭게 살겠다”고 하나님 앞에 고백했다.

그렇게 송 목사의 삶은 다시 한 번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그랜드래피츠침례신학교에 입학해 신학을 공부하면서 캔트 카운티 교도소의 채플린으로 사역했고, 랜싱에서 한인교회를 개척하기도 했다. 1975년 사우스침례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그는 본격적으로 북한선교를 위해 뛰어들었고, 김장환 목사를 다시 만나면서 극동방송 전파를 통한 북한선교의 비전을 발견했다.

미국 시민권 획득, 발로 뛰는 북방선교

1978년 3월, 송 목사는 13년 만에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넉넉했던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돌아온 한국에서 송 목사 내외와 세 아이들은 낡은 집을 전전하며 고생을 면치 못했지만, 공산권에 복음을 전파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았다. 스스로 길을 만들며 살아야 했던 과거의 고생들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하는 일마다 인정받으며 중역(重役)을 맡았다. 아세아방송과 극동방송을 하나로 통합하여 하나의 극동방송으로 만드는 일에 주역을 담당하기도 했다.

중국에 이어 러시아까지 북방선교의 길은 확장됐다. 미국 시민권을 얻은 송 목사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하나님은 막힌 담을 허무시고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내셨다. 극동방송의 전파는 중국과 북한, 러시아, 일본, 몽골 등으로 강력한 전파를 보냈다. 오랫동안의 방송선교는 잊지 못할 에피소드들도 무수히 만들어냈다.

일제에 징용되어 러시아로 끌려갔다가 해방이 되어 만나지 못하는 가족들을 연결해준 이야기, 혈기를 참지 못해 살인을 저지른 19살 미군을 돌보며 교화시키고 그의 간증이 전도지가 된 이야기 등 하나님은 송용필 목사를 선한 일에 무수히 사용하셨다.

한국에서 어와나와 IAK를 시작하다

그 많은 일 중에 어와나 코리아(AWANA KOREA) 설립은 단연 손에 꼽히는 성과다. 1980년대 미국에서 모금활동 중에 어와나를 처음 접했고, 창립자 아트 로하임 회장으로부터 핸드북 번역을 직접 의뢰받기도 했다. 송 목사는 1983년 귀국해 나침반출판사 김용호 대표와 함께 어와나 코리아를 시작했다. 1984년 목동 늘푸른교회에서 첫 어와나 클럽이 시작된 이래 우리나라에는 400여 교회가 어와나 클럽을 진행하며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말씀으로 양육하고 있다.

성경과 의약품을 전 세계에 지원하는 의료선교기관 인터내셔널에이드(International Aid)를 한국에 연결한 것도 송 목사의 업적이다. 미국에서 대규모 약품과 물품들이 한국으로 보내져 창고가 가득 채워졌고, 2004년 북한 용천 폭발사고가 발생하자 인터내셔녈에이드 코리아의 모든 의약품이 북한으로 향했다. 이후 IAK는 세계를 무대로 의약품과 비타민에 복음을 실어 전하는 사역을 펼치고 있다.

이 외에도 올림픽에 참여하는 선수들을 돌보는 채플린으로서의 사역,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설립부터 함께하여 대외부총장으로 섬겨왔던 봉사 등 그의 발자국 옆에는 언제나 또 하나의 발자국이 함께 새겨지고 있다.



너무 일찍 쓰여진 자서전, 사명은 계속된다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사용하신 송용필 목사의 삶을 기록한 자서전 <갚을 길 없는 은혜>(2014)는 영문으로 번역되어 – Grace That Cannot Be Repaid>(2017)로 발간되기도 했다. 밥존스대학교가 송 목사의 삶을 기념하며 영문 자서전을 출판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자서전이 너무 일찍 쓰여진 것은 아닐까 싶다. 여전히 하나님은 송용필 목사를 사용하고 계시고, 그의 사명은 끝나지 않았다.


송 목사는 “나는 복음의 빚진 사람이다. 그 빚을 갚기 위해 복음전파를 위한 선한 일을 하고자 했다. 선한 일을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사람들은 선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빚진 것을 갚겠다고 하는 나의 의지와 열정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이 아닐까 싶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했을 뿐인데 귀하게 높여주시니 감사한 마음 뿐이다. 여생을 주님을 위한 헌신으로 채워나갈 것”이라고 말했다.<크리스찬연합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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