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은 서울대학교 재학시절 예수님을 만나 신학공부를 하고 인도네시아 선교사, 미국유학, 선교학 교수, 지금은 담임 목회를 하십니다. 신학을 하게 된 계기와 선교사, 교수, 목사의 삶 속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말씀해주세요.


저는 대학생때 예수님을 믿었어요. 그 때는 졸업을 앞두고 대기업들이 스카웃을 다니곤 했습니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자 다들 미래가 보장되었다고들 했습니다. 4시간 정도 자면서 공부했는데, 입학하고 보니 저는 해방되었다고 느꼈습니다. 술, 담배하면서 자유를 만끽하였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같이 입학한 친구들은 벌써 공인회계사 시험이나 행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도 공부하려고 했지만 집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꾸 뒤쳐진다는 불안한 마음, 기대하던 부모님께 불효한다는 죄송한 마음이 생겼어요.


그 즈음에 둘째 누님이 저에게 전도를 해습니다. 저는 “예수님 보여달라”며 논쟁하였습니다. 누님은 포기할 법도 한데, 또 오고 또 오고 하는 겁니다. 어느 순간 “뭐가 있긴 있구나”하면서 교회에 따라가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어요. 무엇인지도 모르고 따라간 것이,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수요철야기도회였습니다. 저는 엄숙한 분위기를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난리치는 것처럼 기도하는데 광신도 집단인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멀쩡한 사람들이 저렇게나 애달프게 기도하는 거 보니 무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나와서 머리 숙여 묵도하자고 해요. 저는 믿지 않았지만 예의가 그게 아니니까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 순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 마음의 소리라고 해도 좋고 주님의 음성이라고 해도 좋겠죠. “괜찮다.” 마치 제가 그렇게 엉망인 삶을 살아도 절대자께서 받아주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순간 울컥 눈물이 나오는 겁니다. 눈물샘이 한번 열리니까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밤새 오열했습니다. 그날 밤 저는 하나님의 따뜻한 품에 안겨 회심한 겁니다. 2학년 말인 1981년 2월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지난 날 하나님을 몰라뵈어 죄송한 마음으로 어디서 전해들었는지 그 어렵다고 하는 선교를 마음에 품기 시작했습니다.

1981년 12월 24일, 성탄절 이브에 제가 활동하였던 '캠(CAM)'이라는 대학생 선교회에서 짧은 이성간의 대화 시간을 마련해주었습니다. 제비를 뽑았는데 지금의 제 아내를 그 때 만났습니다. 온유한 성품에 반해 이후에도 교제를 신청했습니다. 만나자마자 “하나님이 자매님을 제 갈비뼈로 보내주신 것 같다고” 말했죠. 바로 들이댄 거죠. 아주 놀라는 자매님에게, “너무 싫지 않으면 만나 달라.”고 고백했어요.

그러다 1982년 4월 경, 말씀을 묵상하는데 오병이어의 이적 후에 몰려오는 무리들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찾는 것은 자신들의 배고픔을 해결해줄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지 하나님 나라의 표적을 경험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시면서 “너희들은 썩어질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행정고시 공부를 하고 있던 저를 향해 소명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함께 자취생활하던 같은 교회 선배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선배는 제가 소명 받은 것 같다고 했습니다. 자치방을 들여다 보기 위해 오신 아버님께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시는 분이신데도, “네가 교회 다닌다고 할 때부터 그 길로 갈 것만 같았다”고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반대하지 않으셨습니다. 교제 중에 있던 자매님에게도 소명에 관해 고백했습니다. 사실 행정고시 공부하는 청년을 만난 건데 진로가 완전히 바뀌는 거 아닙니까? 그 때 처음으로 제가 이성으로 자매님의 손을 잡았습니다. 가만히 있었습니다. 미래를 같이 하겠다는 뜻으로 저는 받아들였습니다. 제가 받았던 소명이 세번의 확인을 받게 된 셈이었습니다. 신학도 공부했고요.

1988년 11월 말, 인도네시아로 선교하러 갔습니다. 뼈 묻으려고 갔죠. 하지만 체류비자도 연장되지 않아 결국 현장 선교를 내려놓은 것이 96년 초였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여러 멘토들께서 선교학 공부를 권장해주셨습니다. 마침내 후원해주시던 교회 목사님께서도 동의해주셔서 미국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Trinity International University)에서 선교인류학자 폴 히버트 밑에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샴버그에 소재한 휄로십교회(김형균 목사)의 환대를 받으며 아름다운 동역을 하게 된 것,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공부 마치고 나서는 싱가폴한인교회 선교 협동목사를 거쳐 2002년 3월부터는 장로회신학대학교 강의전담교수가 되었습니다. 2003년 가을학기부터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현재, 아신대학교)의 일반전임 교수로 임용되었습니다. 순간 순간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2005년도 가을이라고 기억합니다. 높은뜻숭의교회 김동호 목사님께서 제가 협동목사로 있던 일산동안교회의 김해수 목사님과 의논하신 다음 저에서 연락을 주셨습니다. 대략 1천명 성도님들과 함께 분립 개척을 제안하신 겁니다. 저나 교회 모두 위험부담이 큰 선택이었습니다. 서로 검증 기간도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2006년 3월부터 협동 목사로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검증 끝났으니 교수 그만두고 전임사역자로 들어오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때는 교수 학생들이 당시 리더십을 총체적으로 불신임하는 가운데 사퇴를 요구하는 학내 사태가 발발하였습니다. 제가 교회로 옮겨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2007년 가을부터 김동호 목사님의 안식년을 앞두고 있는 교회로서도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기도하는 가운데 제 시간의 절반 정도를 교회를 위해 사용하면서도 교회를 책임지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동호 목사님이나 청년전담 목사님 모두 외부 활동에도 시간을 많이 쓰고 있었기 때문에 든 생각이었습니다. 그 생각이 받아들여져 2006년 12월부터 높은뜻숭의교회에서 장년과 전체를 아우르는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학내사태는 계속되었습니다.

김동호 목사님은 예정대로 2007년 10월부터 안식년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얼마있지 않아 강당을 빌어쓰고 있는 숭의여자대학교가 이제 그만 나가줬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청천벽력이었습니다.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옮겨갈 곳이 없었습니다. 결국 2008년 9월에 안식년을 마친 김동호 목사님께서 높은뜻숭의교회를 해체하여 4개 교회로 분립하는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모두 당황했습니다. 목회자, 직원, 재정, 장비, 성도 등을 4개 교회로 나누는 것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각 교회의 예배 및 교육 공간을 찾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기적같이 이루어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저는 2009년부터 높은뜻광성교회 담임목사가 되면서 아신대학교에는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그후 학교 사태를 마무리하고 정상화되는 듯했지만 그 후에도 새 리더십에 대한 공동체의 실망은 여전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은 계속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2018년도에 학교의 개방 이사가 되어 줄 수 없느냐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마음의 빚이 있는 저는 수락했습니다. 그러다가2020년 7월에 교회로부터 안식월을 허락 받아 양평의 학교 게스트룸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도착한 그 다음 날 새벽에 옛날 채플실에서 엎드려서 기도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오래 기다렸다!” 두번 째 음성이었던 셈입니다.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학교를 버리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수도꼭지 틀면 물이 겨우 쫄쫄쫄 흐르는 것처럼 명맥만 유지시켜주셨는데 이제는 댐 수문을 열고 콸콸콸 쏟아주시겠다는 감동이 왔습니다. 그리고 2020년 11월에 제가 이사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그 음성의 의미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에게 '선교'란 무엇인가요? 이 시대의 선교 방향에 변화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파송을 받아 이 땅에 오신 어린 양 희생제물이자 메시아이십니다. 메시아는 하나님의 지상 통치 대리인이잖아요? 선교는 예수님께서 그의 몸인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는 포괄적인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내내 비유로 천국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부활 후 승천하실 때까지도 천국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표적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성령 받아라” 말씀하신 것도 제자들이 땅끝까지 당신과 하나님 나라 복음의 증인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선교는 지리적·문화적·종교적으로 이 땅의 모든 영역 속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하는 사역입니다. 그 결과는 샬롬 즉 하나님의 평화입니다.

지금 코로나로 인해 사람 만나는 게 쉽지 않고 대면 사역도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니 지리적·물리적 한계를 극복하게 해주는 인터넷 온라인 가상공간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예배 공동체요 선교 공동체로서 인터넷을 활용하여 본질에 충실하면 위기가 도리어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높은뜻광성교회를 소개해주세요. 교회의 비전과 선교방향도 이야기해주세요.


우리교회 이름에 사용하고 있는 '높은뜻'은 하나님의 뜻을 가리킵니다. 높은뜻 정신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신다'입니다. 사람이 주인 노릇하니까 인생은 물론 교회가 망가집니다. 교회의 주인은 당연히 하나님이신데 그렇지 못한 게 현실입니다. 이에 사람이 주인되지 못하게 여러 제도를 마련했습니다. 6년마다 담임목사에 대한 신임투표를 실시합니다. 항존직에 대한 6년 단임제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당회는 큰 틀에서 교회의 방향과 정책을 결정하고, 제직회가 재정을 포함하여 집행하는 이원 구조를 갖습니다. 원로 제도를 폐지함으로써 은퇴하고 나서도 교회를 좌우하는 일을 막았습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뤄 드리기 위해 설립된 겁니다.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께서 명백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시는 삶을 살아내는 높은뜻 사람을 세워가려고 합니다. 높은뜻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삶으로 보여주는 천국 대사입니다.


아세아 연합신학대학교

작년부터 아신대학교의 이사장으로 섬기고 계십니다. 학교 소개를 해주세요. 그리고 학교를 위한 비전과 기도도 말씀해주세요.

아신대학교는 1968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전도대회(대회장: 한경직 영락교회 담임목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 대회가 결의한 것이 있습니다. 아시아 교회 지도자는 아시아 교회가 키우자는 것이었습니다. 수년에 걸친 연구 조사 끝에 1973년 대한민국 서울 서대문에 국제적이고, 복음주의적이며 교파연합적인 신학교육기관을 설립하기로 결의하고 이사회를 조직했습니다(이사장: 한경직 목사).

1974년 5월 1일, 마침내 학교가 개원하였습니다(원장: 마삼락 박사, 부원장: 한철하 박사) 교단 신학교는 교단목회자양성이 목적인 반면 외국의 유학생들을 불러들여 훈련시켜 돌려보내는 선교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학교 이름은 아세아연합신학연구원(Asian Center for Theological Studies and Mission)이라고 했습니다. 영어 이름의 각 단어 머리 글자를 모으면 '사도행전(ACTS)'이 되도록 선교적 설립 목적을 분명히 했습니다.

저는 이사장으로서 갖고 있는 꿈이 있습니다. “지속 가능한 거룩한 선교 공동체로서 ACTS의 재건축”입니다. 학교 안에 선교사 은퇴 마을을 만들어 선교지 경험을 후진들에게 도전하실 수 있도록 계획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문화 가정 자녀들을 위한 기숙형 학교의 설립도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외 우리 학교에 유학 온 외국인 사역자들을 동원하여 한국에 들어 와 있는 외국인 근로자나 외국인 유학생, 그리고 난민 등에게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우리 학교는 그야말로 선교의 전초기지, 선교의 허브, 그리고 선교의 성지가 되길 소원합니다.

우리 학교는 수도권에 위치하고 있습니다만 접근성에 있어서는 지방 학교나 다름 없습니다. 한국 교회나 전 세계 교회가 감염병 시대에 대면 활동이 제약을 받고 있어서 위기 입니다. 예배와 교육 그리고 선교 사역이 원활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위기가 곧 기회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학교의 설립 정신과 사역의 본질에 충실하면 오히려 기회가 될 줄 믿습니다. 온라인 매체를 최대한 활용하면 지리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어서 국내 다른 지방에 거주하는 성도들 뿐만 아니라 해외에 계시는 교포들도 수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동문들이 국적을 초월하여 서로 교통하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좋아하시는 성경구절과 고국을 떠나 많은 어려움과 역경 속에 신앙생활 하는 재미교포 크리스찬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시면 말씀 해 주세요.

좋아하는 성경구절은 상황에 따라 변하는데, 제가 환갑이 지나면서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도니라” (디모데후서4장 7-8절) 말씀을 묵상합니다. 주님 나타나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의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 부르시는 그날, 후회함 없이 달려갈 길 다 마쳤습니다 고백하고 싶습니다.

재미교포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폭동 사건이 일어나면 우리 교포들도 희생을 당하곤 합니다. 그동안 지켜온 신뢰가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망연자실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이번 코로나 위기가 오면서 아시아 사람이라면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폭행도 당하고 가게도 피해를 입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미국이 자유와 인권을 보장해주는 민주주의 사회가 맞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게 됩니다.

저는 “미션'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두 가지 대응 방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은 총과 칼로 대응하고 한 사람은 십자가로 대응했습니다. 검과 몽치를 들고 예수님 잡으러 왔던 대제사장의 군인을 향해 베드로가 칼로 내려쳤지 않습니까? 그 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네 칼을 도로 집에 꽂으라 칼로 일어난 자는 칼로 망하느니라'”(마태복음 2장 52절).

우리는 지금 이슬람이 창궐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잖아요. 요즘 일어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사태와 같이 일부 극단적인 극렬 원리주의자들 때문에 우리도 저들과 같은 방법으로 대응한다면 저들이 어떻게 복음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우리는 자기 십자가(Cross)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릅니다. 무슬림들을 칼로 물리치는 십자군 원정(Crusade)이 우리의 방법이 아닐 겁니다.

억울하게 고통 당하셨지만 원수 사랑으로 묵묵히 십자가 길 걸으셨던 예수님처럼, 재미 교포 여러분께서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고 간다면 미국 땅에도 변화의 역사가 반드시 일어날 줄 믿습니다.

대담 노승빈 (크리스찬타임스 한국후원회 회장, 백석대 교수)·편집 김재훈(크리스찬타임스 한국후원회 부회장, 명활대표 이사)·정리 송다해(크리스찬타임스 한국후원회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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