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바울의 부르심을 묵상합니다. 바울은 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로마도 가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게 하시기 위하여 주님은 그로 죄인이 되게 하십니다. 바울은 죄인이 되지 않았으면 누릴 수 없는 은혜도 누립니다. 로마총독 앞에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분봉왕 아그립바 앞에서도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백부장의 호위를 받으며 안전하게 로마에까지 이르게 하시며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로마에서 먼저는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바울의 꿈은 복음이었습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살아있어야 할 이유, 내가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 내가 떠나가야 할 이유.., 그것은 오직 바울처럼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기를 소망해 봅니다. 사도바울로 하여금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게 하였던 것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행19:21)”는 사명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꿈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은 사명입니다. 우리로 살아있게 하는 것은 사명입니다.
“(행 20:23-24)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우리의 남은 모든 삶이 그 사명을 발견하고 순종하는 길이기를.., 우리의 모든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기 위함이기를 .., 그것이 우리가 살아있는 이유이기를 소망해 봅니다.
어느 날 이곳 사역 길에 동행하였던 한 분이 선교지에서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인가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로부터 잊혀지는 것이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습니다. 전에는 편지와 e메일만 기다렸습니다. 이제는 카톡을 기다립니다. 누군가가 잊지 않고 전해오는 연락이 그렇게 기쁘고 기다려졌습니다. 선교사가 되어 먼저 연락하는 것에는 항상 부담이 있었습니다. 혹이라도 후원에 대한 부담을 줄까봐 머뭇거려졌습니다. 후원을 지속하다가 어려움이 있어 후원을 멈추고 있는 교회와 지인들에게 연락하는 것은 더더욱 머뭇거려졌습니다. 혹이라도 후원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부담이 있을까봐 차마 연락을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선교사로 제가 바라는 것은 물질의 후원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기억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물질보다 더 소중한 것이 관계요 만남이었습니다. 후원이 아니어도 관계할 수 있는 만남이고 싶었습니다. 물질의 후원이 아니어도 기억해 주고, 기도해 주고, 만나 주는 그것이 훨씬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물질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물질은 내가 기대하는 그 누군가가 아니라 주께서 예비하신 그 누군가를 통하여 꼭 필요한 만큼의 은혜를 누리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선 교사는 받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선교사는 주는 자였습니다. 선교사는 주기 위하여 받는 자였습니다. 선교사는 주기 위하여 나누기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자였습니다. 받은 만큼이 아니라 주는 만큼이 선교사가 누려야 할 은혜였습니다. 부자는 가진 것이 많은 자가 아니라 나누는 것이 많은 자였습니다. 가난한 자는 가진 것이 없는 자가 아니라 나눌 것이 없는 자였습니다. 선교사는 결코 가난할 수 없습니다. 선교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나눌 것이 많은 부자입니다.
이 부르심의 길 .., 오직 한 영혼만을 위하여 올라가게 하신 길이었습니다. 지난 10여년 오직 한 영혼 스난의 가족을 위하여 올라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막혀진 스난의 가족을 만나러 가는 길.., 이제는 자오천 형제를 위하여 올라가게 하십니다. 스난 가족을 만나러 가는 길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물인 자오천.., 그의 실패는 모든 것을 잃게 하였지만 그 실패한 도망자의 길에서 만난 주님은 모든 것을 얻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세워진 겟세마네 여관은 그의 기도를 응답하신 주님의 선물이었습니다. 3,700미터 고산도시 더친의 뒷산에서 날마다 겟세마네의 기도를 드렸고 그 기도에 베푸신 은혜가 겟세마네 여관이었습니다. 그가 더친에서 겟세마네의 은혜를 누릴 때 오직 그를 위하여 백마설산을 넘어가게 하셨습니다. 20시간의 침대버스, 밤잠 못이루는 고산반응의 고통, 이제는 더 이상 백마설산을 넘어갈 수 없는 몸과 마음의 바닥에서 자오천을 샹그리라로 내리심이 은혜였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세워진 '엘림(以琳)' 여관은 '마라'의 쓴물 같이 지나온 자오천 형제의 길을 '엘림'의 단물로 바꾸어주신 주님의 선물이었습니다. 그가 샹그리라에서 엘림의 은혜를 누릴 때 이제는 그의 부르심이 있는 샹그리라에서 잠시 멈추어도 되는 은혜를 누리게 하십니다. 지난 10여년 해발 4,300미터의 백마설산 고갯길과 3,700미터의 티벳 고산도시를 넘나들게 하신 어느덧 60회, 이제는 잠시 샹그리라에서 멈추라 하십니다.
2018년 3월 26일
송영광·최은진 가족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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