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교회 후임자 선정
박조준 목사가 영락교회를 사임하자, 영락교회 당회원 중에 나에게 후임자를 추천해 달라는 분들이 있었다. 나는 심사숙고한 끝에 미국 Detroit에 있는 김득열 목사를 천거했다. 그랬더니 김득열 목사에게 연락하여 그의 설교 tape을 보내 달라고 하여, 그 녹음 tape으로 그의 설교를 들었다. 그러고는 설교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서 그를 후보에서 제외하고 말았다. 그러는 중에 이창로 장로등 원로급의 인사들이 의논 끝에 미국으로 가서 김윤국 목사에게 영락교회 당회장이 되어달라고 졸랐다. 그래서 김윤국 목사가 영락교회 담임 목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나는 김윤국 목사의 청탁, 곧 한국에 있는 일자리를 구해 달라고 하는 청탁을 접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김 목사의 사모님 때문에 시카고 시세로 장로교회에서 고전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나는 한국의 어느 교회에게도 김목사를 추천할 마음이 없었다.
김윤국 목사의 영락교회 부임
김윤국 목사가 영락교회에 부임하자, 나는 친구를 환영하는 마음으로 영락교회 당회실로 그를 찾아갔다. 우선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영락교회에 부임한 사실을 두고 축하였다. 그러면서 내가 한가지 부탁을 드렸다.
“김 목사께서 대형 교회, 아니 초대형 교회를 맡았으니, 치하를 하지만, 대형교회 목회 이론은 아직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왕 이 큰 교회를 맡은 이상, 대형교회 목회 방법론을 하나 연구 발표하시기 바랍니다.”고 당부를 드렸다.
나는 그가 부임하는 때에 김종춘 목사를 소개하여 부목사로 취임하도록 도왔다. 김종춘 목사는 신학교 입학과 함께 나를 따르며 그림자 같이 붙어 있었다. 내가 그의 결혼 주례를 하였고, 대소사에 나와 함께 하였다. 그래서 그가 부산 광복동 교회를 사임하고 목회 자리를 물색하면서 나에게 부탁을 하기에 그를 영락교회에 소개했던 것이다. 영락교회가 내건 조건이 있었다. 우선 연령이 40세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이북이나 영남 아니면 서울 출신의 목사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조건들에 맞지 않는 김종춘을 소개했는데, 영락교회 당회와 김윤국 목사는 나의 추천을 받아들여, 그를 정식으로 부목사 자리에 등용하였다. 김윤국 목사가 2년 여 만에 영락교회를 물러날 때 김종춘 목사는 김윤국 목사를 여러 모로 도왔다. 김윤국 목사가 영락교회를 조기 후퇴한 이유는 역시 원로목사의 세력이 교회를 좌지우지하고 있었고, 당회장의 실권이 유야무야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경직 원로 목사파가 김윤국 목사파와 대립되었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는 대학생들의 의식화 운동의 전성기였다.
김용복 박사 영입과 그 후유증
1980년대는 대학생들의 의식화 운동의 전성기였다. 대학마다 학생들이 데모를 하고, 국가에 대해서 또는 대학 내부적으로 모든 것을 들추고, 성토하고, 개혁을 부르짖는 시대였다. 장로회신학대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른 대학들과 연계하여 거리로 뛰쳐나가 데모를 하고, 때로는 다른 대학을 우리 대학으로 초치하여 고함을 지르며 돌을 던지며 시국을 꾸짖었다. 내부적으로는 교수들 하나하나를 비판하고, 그 내용들을 대자보(大字報)로 폭로하는 것이었다. 장신대 교수들 중에, 학생들에 의하여 거론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지탄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었다. 대학 자체에 대한 그들의 비난은, 어째서 우리 대학에 더 좋은 교수들을 받아들이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특히 사상적으로 보다 참신한 사람들을 영입하라는 것이었다. 해방신학, 민중신학이 유행하던 시대였는데, 어째서 우리 대학은 그런 사상을 가진 교수들이 없느냐는 둥 불만을 쏟아내는 것이었다. 나는 학장으로 학생들의 불만을 조금이나마 풀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의 의중에는 홍성현, 김용복 박사 등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홍성현 목사는 줄곧 자기 모교인 장신대의 교수직을 노리고 있었고, 기회만 있으면 뚫고 들어오려는 운동도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과격함 때문에 그리고 그의 학위 문제 때문에 이사회나 교수회가 그를 기피했던 것이다.
이제 김용복 박사가 우리 교단 인사 중에 민중신학을 주장하는 자로서 이름이 나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그의 이름을 계속 들먹이고 있었다. 나는 그를 잘 알고 있는 처지였고, 그를 등용할 마음이 있었다. 교수들에게 타진한 바, 주선애 교수와 그 외 한 두 분이 크게 반대하고, 대다수는 내 의견을 따랐다. 그래서 나는 그를 교수회원으로 영임하기에는 이르고, 다만 장신대 안에 있는 어떤 외곽 기관에다 둠으로써 학생들의 마음을 도닥거리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이종성 학장 시절에 만들어 놓은 세계교회지도자훈련원 부원장 자리에 그를 앉혔다. 원장은 서정운 교수였다. 그래서 학생들은 어느 정도 만족해했다. 그러나 시국에 대한 학생들의 데모는 끊어지지 않았다. 국가 정보국에서 전국 대학생 운동을 예의 주시하며, 해방신학을 용공 운동이라고 낙인을 찍고 극력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민중신학을 그 연속선 상에 두고 역시 주시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암암리에 정보부에서는 김용복 박사가 장신대 안에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계속>

박창환 목사
전 장신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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